근황 (25.02.17)

<소나티네>

by 취생몽사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는 삶의 허무를 한 그릇 가득 담아 남김없이 쏟아내는 영화다. 제목인 <소나티네>는 ’소나타‘가 되지 못한 불완전한 곡을 의미한다. ’소나타‘는 3~4악장으로 이뤄진 반면 ’소나티네‘는 주로 2~3악장으로 이뤄진 불완전한 구성을 갖고 있다. 영화 속 무라카와의 모습은 폭력에 대한 환멸 - 도피와 유희 - 허무와 죽음이라는 3악장을 가로지른다. 이를 니체가 이야기한 3단 변화와 함께 떠올리면 흥미롭다. 니체적 변신은 순응하는 개인(낙타)에서 반항하는 개인(사자)이 되어, 끝내는 창조하는 개인(어린아이)으로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무라카와는 이미 시작부터 조직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보스에게도 불손하게 구는 등 이미 반항하는 개인으로 보인다. 그는 오키나와의 도피 생활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놀기도 하지만, 끝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했다. 결국 그를 쫓아온 폭력과 대면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언덕 너머에 그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음에도 스스로 붕괴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 불완전한 비극이 결국 소나티네인 것이다.

영화 내내 죽음은 계속해 희롱당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죽음에 어울리는 예의나 의전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든 등장인물들은 담담한 표정이다. 소리를 지르는 이도 놀라는 이도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죽음에 대한 예외적인 대우가 타란티노의 그것처럼 활극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내내 죽음이 예비되어 있기에 별 호들갑 없이 죽음을 나열하는 것뿐이다. 영화 속 죽음은 별다른 사건이 되지 못한다. ’소나티네‘ 속 죽음은 의외성을 빼앗기는 방식으로 희롱당한다. 반면 영화 속 유머에는 의외성이 덧붙여진다. 죽음에게서 빼앗은 의외성을 유머가 먹어치웠다고 해도 좋다. 덕분에 이 영화는 더없이 차갑고 슬픈 유머들이 점멸한다. 진정한 의미의 냉소인 것이다.

무라카와는 오키나와로 갈 때부터 조직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눈치챈 듯하다. 하지만 그는 별 다른 말 없이 오키나와로 향한다. 그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냉소다. 그는 끊임없이 냉소하는 자다. 오키나와의 도피 생활 속에서 다른 패거리와 어린아이처럼 놀아보기도 하고 미유키를 만나 로맨틱한 순간들을 즐기기도 하지만, 그것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냉소한다. 그는 끝내 어린아이가 되지 못한다.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 채로, 자신을 쫓아온 폭력과 대면한다. 무라카와는 패거리들과 해안가에서 서로에게 폭죽을 쏘는 와중에 총을 쏘기도 한다. 죽음과 놀이는 한데 어우러져 있었으나, 결국 무라카와가 돌격 소총을 들고 조직원들에게 총을 쏘는 밤에 미유키는 폭죽을 하늘에 쏘고 있다. 무라카와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미유키는 폭죽을 하늘에 쏘며 그의 삶을 기원한다.

결말에서 미유키는 해안가의 언덕 너머에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무라카와를 마냥 기다린다. 언덕 하나만 넘으면 미유키가 기다리는 해안가가 있는데도, 무라카와는 멈춰 선다. 그는 그제야 권총을 꺼내 자살한다. 그는 끝내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그 문턱에서 허무에 굴복하여 붕괴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해안가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택했다. 당장 돌격 소총으로 조직원들을 해치운 직후에 자살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피안의 해안가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그가 결국 자살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푸른빛 우울한 자동차가 멈춰 선 순간에 주목할지 모르나, 영화가 부러 은폐한 귀환의 여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관객은 이 깊고 진한 허무 속에서도 이 어두운 허무의 건너편에 우리를 기다리는 삶의 찬란한 순간을 곱씹어볼 수 있다. 때론 무라카와와 마찬가지로 시동을 멈춰버리고 싶을 수도 있으나, 때로는 차를 마저 몰아 언덕을 넘어 미유키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의 열망 또한 맛볼 수 있다. 죽음이 담담해지는 날들 속에, 자살할 것인가? 살아나갈 것인가? 니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카뮈의 문장을 통해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