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만 늙고만 몽둥이 맞는 꼬마
그러니까 내 유년기의 토막 난 장면들을 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십 년 하고도 몇 년이 더 걸렸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문장은 정말이지 절대적인 진리 같았다. 초등학교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제출했던 가정 소개 글이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 집 가훈이 '정직하고 성실하자.'가 아니라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라고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욕지거리와 함께 발바닥을 경찰 곤봉으로 맞던 것은 아주 보편적인 내 일상이었으나, 그 이유만큼은 갖가지였다. 받아쓰기를 틀린다거나, 일기를 빼먹었다거나 하는 매우 중차대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흠칫하는 어떤 장면들은 매를 맞는 장면이 아니다. 독기를 품고 입술을 앙다문 어머니의 표정이나, 가끔씩 이불속에 머리를 박은 채로 소리 지르게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겐 여전히 섬뜩하다.
그런 일상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당시 내 경험세계에선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패고 패고 또 패는 곳에서 수학했으며, 내게 그런 학교란 집안에서 벌어지던 그 아수라가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생들은 "1000대쯤 맞으면 졸업하겠지?"와 같은 말을 신입생들에게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나름 우등생에 모범생이었기에, 뺨 몇 대를 포함해서 한 300대쯤 맞았다. 학생인권조례인지 뭔지 하는 것이 통과되고 나서야 나는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리고 담배를 그때 처음 입에 물었다.
학교야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 감사합니다."하고 그렇다 치고, 내가 집에서 매를 맞지 않게 된 것은 횡령으로 아버지까지 옷을 벗게 만든 아버지 회사 후임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까. 사내연애 후 결혼, 그 이후 가사노동과 육아에만 매진했던 어머니가, 공인중개사니 유치원 보육교사니 하는 일들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그 이후 어머니는 결코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넌지시 물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눈치다. 난 의외로 정말 당신께선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마치 사려 깊은 사람인 양,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이제 내가 어머니보다 20cm도 넘게 키가 크기 때문은 아니다. 지금은 당신께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그 시절의 악독한 표정과 폭력이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 스스로를 힘들게 했을 우울증의 일부 아닐까 싶어 그렇다. 폭력의 틈에서 자라난 아이들 상당수가 그렇듯이, 나 또한 사람 패는 법을 알고 있다. 나라고 그 우울증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법이 있겠나. 가끔씩 그 폭력의 기억들이 나를 평생 따라붙는 추악한 낙인 같은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다.
낡은 기억을 들춰보다 이렇듯 몸을 휘감는 장미가시가 떠올라 몇 줄 적고 말았다. 갑자기 지나치게 희극적인 결말일지 모르나, 몸뚱이만 늙고만 몽둥이 맞는 꼬마는 그 이후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이것저것 가사노동에 관심을 가졌더랬다. 여전히 다림질을 시도하지 않아 찝찝한 마음도 한가득이다. 피부든 마음이든 생채기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내 가진 나름의 미덕인데 말이다. 그래도 노랫말을 읊는다. 아주 가끔 날 괴롭히는 건 다 끝난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