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났네 정전났어
밥먹고 집에 앉아 있는데, 문득 사방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아 이것은 분명 클리셰다. 당연히 이것은 적의 야습이다. 누굴까. 일단 적은 많은 것 같다. 근데 보통 내 쪽이 그를 적대하는 것이지 나를 굳이 적대까지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기습이라면 굳이 그것을 7평도 되지 않는 내 방에서 진행하기 보다는 내가 러닝할 때를 노려서 중랑천에 유기하는 편이 간단하다. 게다가 창문 밖에 쏟아지는 햇살이 골목 구석구석을 비추는 이 온화한 봄날 오후, 야습이라니 택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리 고요한가. 내가 깨달음을 얻어 드디어 열반에 들게 된 것일까? 그럴리도 없다. 나는 여전히 주체되지 않는 욕망과 고뇌를 그득그득 품고 산다. 다시 연구실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공동현관문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CCTV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전기가 나갔다. 집에 전자제품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요했다. 그래도 명색이 전력계통 그 중에서도 배전 연구하는 엔지니어인데, “전기가 나갔다.”같은 표현을 써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다.
공용 전기와 집 안의 차단기를 확인해 봤는데 내려간 것은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 전력량계를 확인해보니 4층의 두 세대와 내 방, 공용 전기가 계측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집의 전기는 정상적으로 계측이 되고 있었다. 빌라 주민 한 분이 오셔서 한전에 전화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한전이 이런 일도 하나 싶어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는데, 이미 행동하는 시민이셨던 301호 아주머니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배전반을 열고 차단기를 들여다 보는데, 나한테 차단기는 T-C 곡선과 스위치 기호일 뿐 사실 이 설비의 물리적 형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 다시 깨달았다. 건물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통신선인지 전기선인지 알 수 없는 선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301호 아주머니의 전화를 건네 받았다. 다소 귀찮은 듯한 말투의 한전 상담원께서 차단기 아래의 버튼을 눌러보고 차단기가 내려가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안 내려간다고 했더니 내 전화번호를 묻고 기다리라고 했다. ‘아 이 노란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원래 트립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빌라 주민들에게 내가 뭘 연구하는지 얘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한전 사업소 직원으로 추정되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상황을 다시 설명했고,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일단 연구실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정말 30분만에 집에 오신 모양이다. 다시 전화가 와서는 날이 풀려서 퓨즈가 손상되어 끊어졌다고 설명해주셨다. 퓨즈가 무엇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는데, 왠지 모를 업계인으로서의 호승심이 들었다. “그런데 같은 건물에 있는데도 특정 세대만 끊어질 수 있나요?” “아 그건 전기가 건물에 들어갈 땐 하나로 보이지만 사실 3상으로 들어가는데, 그 중 하나가 끊어진 거라서요.” 3상 전력의 경우 전기공학과 학부 2학년 때 배우는 내용으로 전력 공학 수준도 아니다. 한전 직원분께서 친절하게 3상 전력에 대한 강의를 해주셔서 잠자코 반성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방에 들어오는 전기에 대해 별로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냉장고는 A상, 컴퓨터는 B상 같은 게 말이 될리가 없었다. 통화하는 분이 내 전공을 알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접수한 지 40분만에, 상황 진단 - 출동은 물론이고, 퓨즈를 교체하고 전력 상황 확인하여 전화까지 주신 모양이다. 여러분, 한국전력공사가 이렇게 일을 잘 합니다. 공급신뢰도 유지를 이렇게 미친듯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력공사는 2010년 기준 SAIDI(1년 동안 한 수용가가 겪는 정전 시간)가 이미 15분이 안 되는 미친 전력 회사입니다. 똑같이 접지 계통 쓰는 미국은 2020년에도 1시간이 넘습니다. 한국인이 만족할 수 있는 이 서비스와 속도, 경이롭지 않습니까? 헌재는 이니셜도 같은 한전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전력 소비자 새끼들아, 전기 요금 더 내라. 전기세 아니냐고? 한 번만 더 전기세라고 얘기하면 당신은 죽소. 고조파 시뮬레이션 잘 안 돌아가서 열 뻗치는 금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