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
교황이 죽었다. 로마의 주교, 그리스도의 대리자, 으뜸 사도의 후계자, 보편 교회의 최고 대사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 마침내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어부의 반지가 죽은 교황의 손에서 빠져나온다. 교황의 죽음은 세상에 공표되고 전세계의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콘클라베를 치룬다. 추기경들은 3분의 2 이상이 동의한 이가 새로이 교황에 오를 때까지 거듭된 투표를 진행한다. 투표 중에 추기경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된 채 투표에 임할 것을 요구받는다. 밖의 사람들은 성당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검은 색인지 흰 색인지 바라보며 새로운 교황을 기다린다. 이 닫힌 공간에서 교회는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당한다.
영화 <콘클라베>를 보면서 교회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두고 벌어지는 정치적 설전이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1962년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카톨릭 신앙을 현대로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그 결과 교회는 세계와 더욱 밀접하게 호흡하게 되었고, 냉전부터 시작하여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제들을 두고 세속의 사람들과 겸상을 시작했다. 교회는 가장 오래된 공동체 중 하나로서, 세상 속 수많은 공동체의 원류이며, 동시에 가치관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최전선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극 중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이 콘클라베가 전쟁이 아님을 주장하지만, 대번에 콘클라베가 전쟁임을 주장하는 알도 벨리니 추기경의 강변에 힘없이 굴절되고 만다. 콘클라베는 전쟁이며, 로렌스도 벨리니도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 역시도 그 전쟁 속에 놓여 있다.
주인공인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은 교회의 현재, 즉 고독과 불안을 상징한다. 그 고독과 불안은 의구심이다. 교회는 길잃은 양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목자여야 했으나, 현대화된 세계 속에서 교회마저 덩달아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다. 이른바 길잃은 목자라 해야 한다. 로렌스 추기경은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 속 악마와 연거푸 눈을 마주친다. 그림 속 악마들은 칠대 죄악을 비롯한 죄지은 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내려간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가 눈을 마주치는 악마가 끌고 내려가는 자는 칠대 죄악을 저지른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눈을 가리고 괴로워하는 이 자야 말로 의심하여 뒤늦게 후회하는 자다. 길잃은 목자의 말로다. 닫힌 교회 속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적대에 휘말린 로렌스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추기경들 앞에 나선다. 그 순간 그는, 그리고 그의 교회는 공격받는다.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을 뜻하는 ‘쿰 클라비‘(Cum Clavis)’는 테러리즘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분노와 적대감이 추기경들 사이에 고조된다. 흥분한 추기경들 사이 테데스코 추기경은 교회의 과거를 상징한다. 그는 교회가 다양성과 상대주의로 인해 약해졌으며, 전쟁을 통해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교회는 다시 한 번 두쪽이 나고, 추기경단의 가장 앞자리에서 로렌스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 끝에 등장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상징하는 베니테스 추기경이다. 전임 교황에 의해 비밀리에 서임되었던 베니테스 추기경은 전장 속에서 교회를 세우고 죽는 사람 곁에서 사목활동을 해왔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전쟁에 대해 아느냐 묻고,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저들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라 일갈한다. 다시 투표는 시작되고, 닫힌 교회에서 뻐끔 열린 공간으로 한 가닥 새소리와 한 줌 산들바람이 들어온다. 로렌스를 비롯한 추기경단은 베니테스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베니테스는 스스로의 이름은 무결한 자 인노첸티우스라 칭한다.
강하게 결속된 공동체만이 능사가 아니며 때론 뻐끔 열린 창 밖에서 담론은 불어 들어온다. 바티칸의 중심부는 성적 추문과 비리의 온상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음에도 살아 남았고, 로렌스 추기경은 이 느릿하고 잔뜩 웅크린 교회가 다시 나아갈 수 있음에 미소지으며 거북이들을 돌본다. 권력의 가장 가까운데서 담론이 생성된다는 헛된 믿음 사이로, 담론은 권력과의 거리가 아닌 권력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임재한다는 것을 <콘클라베>는 탄탄하게 역설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지닌 시의성이란 프란치스코 성하께서 병증과 씨름하고 계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적대와 의심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미래를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강렬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만하고 부덕한 자들아,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