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샘 봄 비
매년 이 맘 때쯤 평일에는 멀쩡하더니 주말만 되면 비가 오는 현상을 나는 꽃샘봄비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다. 나는 이를 꽤나 자랑스러워 한다. 물론 나는 기상학자라거나 우리말 연구가는 아니고, 연구자나 글쟁이의 측면에서도 큰 재능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도 예쁜 한 글자 단어 네 개를 연달아 붙여 만든 이 단어를 제법 좋아한다. 그러니까 꽃을 시샘하여 내리는 봄날의 빗줄기가 또 주말에 쏟아졌고,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을 하서나 기타를 치거나하며 한량의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영화나 볼까 싶어 미야케 쇼의 영화를 예매해두었는데, 버스카드도 연구실에 두고 왔고 오늘은 좀 스파이시한 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취소했다. 스파이시한 영화 대신 속터지는 야구를 보다가 연구실에 가서 카드를 가져왔다. 애기능 동산에 벚꽃으로 남아있던 봄의 정취가 거진 살해당했고, 그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같은 철쭉이 흉흉하다. 이렇게 또 한 철의 봄이 사라졌구나 애달파했는데, 코를 찌르는 짙은 향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카시아가 제법 남아있다. 내게 아카시아는 이름을 알기도 전에 맡아버린 향으로 남아있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의 주택에서 저녁을 먹을 즈음에 바람을 쐬고 있으면 광교산에서부터 날아오는 아카시아 향이 밤공기에 넘실거렸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아카시아 향은 밤에 더 진하다. 그게 퍽 마음에 든다. 이 잘고 여린 꽃잎은 떨어지자마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굴러다니는 탓에 그 낙화가 요란하지도 않다. 그것도 마음에 든다. 꽃샘봄비 하루 종일 세차게 내렸어도 아카시아 한 줌 남아있어 제법 기쁘다.
이런 생각만 하면서 가끔 산책이나 하고, 가끔 연초나 한 갑 사와서 한 잔 가득 술이나 마시고. 대충 그대로 늘어져서 자다가 다시 일어나서 책이나 읽고 영화나 보러 다니고 싶다. 내 구글드라이브 폴더명처럼 살고 싶다. “한때의 치열함을 누구에게 자랑하겠소.” “대장부로 태어나서 연구직이 웬 말이냐.” 요즘 일하는 것들은 또 무슨 제목 달아서 모아두어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내일은 아침에 러닝, 점심에 결혼식, 저녁에는 줌 회의 있는 날. 바쁘게 움직여야지. 그러려거든 이제 얼른 자야지. 어제 꿈자리가 좋지 않아 오늘 하루 공쳤다. 꽃샘봄비 내리던 날에 그리운 사람을 왜 종로에서 만났을까. 아휴 정말, 취해서 살다가 꿈속에서 죽어야지. 좋은 일도 좋지 않은 일도 아예 없는 밋밋한 하루였네. 밤하늘이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인지는 몰라도, 디폴트값이 그렇다는 것에는 동의해. 언젠가는 이런 눅눅한 날을 벗어나 꽃 핀 쪽으로 건너가서, 사람들 하는 얘기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 나는 좀 더 귀여워질 수 있겠지. 일단 그게 오늘은 아닌 것 같으니 꽃샘봄비 맞으면서 술이나 한 잔 먹고 자야지. 같이 뛴다는 친구가 6시 50분에 전화해준다고 했다. 든든하고 허전한, 아무래도 유머감각 별로 없는 일요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