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영화. 도주
<도주> 봤다. 키리시마 사토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속한 혁명 활동가이다. 그는 마르크스나 레닌을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일본 제국과 전범 기업들이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인민들을 착취해왔으며 그 죗값을 치르게 해야한다는 혁명(?)의 확신을 품고 있다. 그들 조직은 폭력 투쟁을 통해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고 연쇄적인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폭탄을 활용한 기업 파괴 공작을 이어간다. 그들은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는 투쟁 기조를 가져가고 있었으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강력했던 폭발물로 인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참사(미쯔비시 중공업 테러)가 발생하게 된다.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로 인해 조직의 대부분은 붙잡히고 키리시마 역시 도주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키리시마는 ‘인민의 바다’라는 일용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불분명한 신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임시 숙소까지 제공하는 일용직 노동이야말로 그가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이었다. 유일한 선배가 전달한 마지막 지시가 도주였기에, 그에게 도주란 곧 투쟁이었다. 고된 육체 노동 끝에 숙소에 돌아와 밥을 먹으며 “이건 그냥 사는 것이잖아?” 힘없는 웃음을 머금기도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혁명의 확신을 품고 이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렇게 49년의 도주 생활이 시작된다.
영화는 키리시마의 눈으로 국가의 권위가 떨어져가는 20세기 말의 일본을 조명하며, 언뜻 인과로 보이는 투쟁과 도주를 삶이라는 맥락 속에 버무려낸다. 젊어서 혁명을 꿈꾸는 이들 중 태반이 막상 삶이 먹고 사는 일에 대해 질문하면 완장을 벗고 깃발을 내려놓는다. 대부분의 우리는 삶 속으로 도망친다. 떳떳함 대신 똑똑함을 택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투쟁은 거기서 끝나는 것인가? 아닐 수 있다. 매달 빠져나가는 CMS로 투쟁하노라 자조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때 믿었던 그 구호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면, 우리는 이 도망쳐온 삶 속에서도 투쟁한다. 잔뜩 속물이 되어버렸지만 애매하게 사느니 변절자가 되겠다는 친구들에게 “너네 그 때 왜 안 진지했던 척 하냐?”고 물을 수 있다.
때론 사는 것도 투쟁일 수 있다. 하루하루 어찌저찌 버텨내고 술 한 잔 걸치며 씁쓸해하는 오후에도 투쟁이 깃들 수 있다. <도주>라는 영화가 키리시마 사토시라는 다소 극단적인 인물을 다루고 있음에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키리시마의 헛웃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한 때 믿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 “도망치는 것이 곧 투쟁을 지속하는 것, 그러나 이건 그냥 사는 것이잖아?” 그냥 살고 있지만, 다소 절정에서는 내려와 적당히 도주하며 살고 있지만, 어떤 믿음들은 여전히 가슴 가까운 곳에 묻혀 있다고. 이념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이 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더라도, 언제고 모든 것을 불태울 광기와 함께 살아가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