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치기
정치적 용어로서 갈라치기란 무엇일까? 아마도 특정 이슈나 정체성을 중심으로 대중을 인위적으로 분열시켜, 상호 간 갈등을 유도내지 조장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전략을 뜻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정치인에게 ’갈라치기‘를 일삼는다며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갈등을 해소시키는 정치의 의무를 배반하고 그 적대감을 활용하는 것에만 골몰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갈라치기‘는 정치의 도의를 저버린 채 정치공학에 매몰된 이들을 꾸짖는 말이다. 그러니 재미있게도, 우리 사회의 각 진영은 상대 진영의 정치인들에게 ’갈라치기‘의 혐의를 씌우려 한다. 2030 남성 커뮤니티에서는 문재인이 ’갈라치기‘한다고 이야기하고, 2030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이준석이 ’갈라치기‘한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는 합의되지 않았으나, ’갈라치기‘라는 단어가 주는 직관적인 통렬함은 정치 고관여층 전반에서 수용되는 듯하다.
그러나 ’갈라치기‘라는 말에 내포된 시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위험하다. 첫번째로, 대중을 쉽게 갈라쳐지는 존재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갈라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중을 정치인의 말 몇 마디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가짜뉴스가 양산되어 정보를 제대로 식별하는 능력이 보다 희귀해진 시대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대중을 무시하는 시선은 대단히 거북하다. 두번째로, 작금의 갈등이 어느 정도 조장되었다는 전제가 있으므로 실제 갈등 상황에 대한 이해를 막고 문제 해결에 소모되어야 할 공론장이 혼탁해진다. 이 역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참된 정치에 대한 배반까지는 아니어도 해태쯤은 된다.
그러니 나는 ’갈라치기‘라는 언어를 거부하고 싶다. 정치적 언어는 단지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고 그 현실 속 우리들의 행위 가능성을 제한한다. 어떤 맥락이든 ’갈라치기‘라는 언어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분열과 갈등의 도화선을 품고 살게 된다. 남들이 나를 싫어하든 말든 맘 편히 잘사는 군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장 주변의 시선 미친듯이 신경쓰느라 정치적 성향 공개 여부에 따라 친한친구/멀티프로필 쓰는 나같은 소인배는 굉장히 피곤하다. 내가 왕년에 사람은 좀 죽였지만, 사실 싸움을 싫어한단 말이다. 진짜다. 싸움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대책을 캐물어야 한다. 그게 원래 정치가 해야하는 일이다. 이 갈등상황에 대한 어떤 이해가 필요한지, 그래서 각각이 생각하는 대책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과 사회적 우선순위를 고려하면 어디쯤에서 합의해야 하는지, 그런 걸 따져물어야 한다. 그런 논의가 사라진 자리에는 지난 대선 윤석열과 심상정이 벌인 것처럼 ’여성가족부 폐지‘ - ’여성가족부 강화‘ 같은 것이나 외쳐대는 볼썽사나운 슬로건 대결만 남는다. 상대의 괴담을 폭로하는 것에 몰입하기 보다는, 서로 만들어가는 미담 같은 걸 좀 쌓아볼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파랑 빨강 주황 (노랑) 막대 그래프 하나 놓고, 한 세대를 단어 몇 개로 치환하려는 시도도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기야 세상의 타락은 언어의 타락으로 표상된다. ’갈라치기‘ 일삼는 인간들보다 그들 뜻대로 순순히 ’갈라쳐진‘ 인간들이 나는 더 안타깝다. 음모론의 가랑이를 기어다니는 인간들이 ’계몽‘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무적(無籍)자는 필연적으로 무적(無敵)자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가끔은 세상 모두가 적같으니 무적(無籍)자가 곧, 만적(萬敵)자다. 왕년에 죽인 사람들이 한때는 동지였고 친구였던 게, 창의적인 방식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