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장
모기장 샀다. 어려서 여름에 할머니 댁에 가면 모기장을 치는 것으로 잘 준비를 시작하곤 했다. 갈색도 회색도 아닌 어딘가 퀴퀴한 벽장 냄새가 나는 모기장을 펴고 대청마루에 모기향을 피워두어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어릴 적이라 하여 여름 시골에서의 낭만적 이미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두막 같은 곳에서 수박을 먹다가 별을 헤아리며 잠에 빠지는 그런 로망이 내게도 있었다. 그 로망들은 아무래도 모기장에 걸러진 것인지 촘촘하게 해체되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고추와 콩, 냉이 정도만 심어두던 텃밭에 원두막이 있을 리 없다. 털털거리는 선풍기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피투성이가 된 기억은 있지만 그건 그다지 로망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시골집의 모기장이 나름대로 낭만이었음을 구태여 부정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제는 모기장을 샀다. 이만원 남짓에 낭만까지 배송되지는 않았다. 어제 진짜 피곤해죽을 것 같았는데 모기 돌아다니는 통에 몇 번이나 선잠에서 깨어난 뒤 충동적으로 사버렸다. 어릴적 모기장을 치려면 벽에 박힌 못에 매듭을 걸어야 했는데, 요즘은 모기장도 원터치다. 매트릭스에 그냥 끼우듯 설치하면 된다길래 그냥 사버렸다. 원터치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 웃긴 것이 접혀온 모기장은 대충 툭 건드리면 와랄랄라 펼쳐지는 형태다. 어떻게 다시 접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건 원터치가 아니라 개복치에 가깝지 않나. 낭만없는 냄새도 없는 모기장엔 별 설명서도 없어 낑낑거리며 모기장을 설치했다.
덕분에 영화티켓 한 장 없던 헌혈 생활을 청산했다. 띵석 매혈기는 이제 끝이다. 너무나 아늑하다. 드디어 나만의 아지트가 생긴 것 같다. 반투명한 움막 형태가 이렇게 안정감을 준다는 것은 내 DNA 어딘가에 선사시대의 경험세계가 녹아 있는 것은 아닐까? 에어컨 바람은 잘만 들어온다. 이 놈이 흘려대던 물이나 얼음조각들로부터도 안정적이다. 톨스토이가 조선 땅에서 태어났다면 ‘사람을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다르게 답했을 것이다. 모기장으로 에워쌓인 이 싱글베드, 그것이야말로 삶의 행복이다.
이렇듯 소비에 행복해하고 있자니 허지웅이 에어컨 사고 좋아라 했다가 에어컨 좌파냐며 욕처먹던 2000년대 초반을 떠올렸다. 나는 모기장 좌파…일리가 없지. 나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좌파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어서 좋은 좌파들이 등장하면 엉덩이 털고 저 오른쪽 구석으로 자리 옮길 생각이다. 그 날이 언제야 오는 것이냐. 이 울보 촌놈 새끼들 대체 수권할 수는 있는 것이냐? 어쩌다가 이런 놈들만 주변에 그득그득한 것이냐? 팔자 타령을 좀 해보려다가, 그냥 모기장이나 쓰다듬기로 했다. 소비란 안분지족하는 삶을 돌리기 위한 약간의 기름칠 같은 것이다. 모두 편한 잠들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