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25.07.15)

by 취생몽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올여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봄부터 생각해 왔다.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이미 정신이 없으셨고 몸은 점점 더 오그라들고 계셨다. 간호사들이 외할머니를 모시고 사라지는 병동에서 엄마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새벽 두 시쯤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하는 이십 분 사이에 누구도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듣기로 요양병원에 계신 분들은 대개 그렇다고 했다. 내가 식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마른 눈물과 피곤함 위로 젬마라는 세례명의 외할머니 사진이 둥둥 떠다녔다.


사실상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있지만, 외할머니의 세례명 정도는 알아두고 싶어서 검색해 보니 ‘보석’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정해진 세례명일까, 당신께서 직접 고르셨을까. 세례명과 달리 지나치게 초라한 영정사진을 보면서, 나는 외할머니의 최고였던 모습을 떠올려봤다. 술은 여자음식 아니라던 친할머니와 달리, 외할머니는 본인 칠순에도 소주를 병나발 부시던 사람이었다. 아흔 다섯 할머니의 생애가 내겐 그런 것뿐인가 싶어 약간은 착잡했다.


친가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외가 친척들도 나는 잘 모른다. 사촌들 몇몇 얼굴은 알아봤고, 서열을 알 수 없는 이모들과 삼촌들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내게 가족이란 아주 옅은 감각이라 벽에다 대고 인사하는 기분으로 거듭 인사를 했다. “명석이구나, 못 알아보겠다.” 못 알아본 사람들이 거듭 인사해서 죄짓는 기분으로 계속 앉아 있었다. 오히려 날 알아본 사람들은 멀리서만 고개를 까딱였다. 작은 규덕이(아버지 이름이다.) 왔냐는 큰 이모나 한번 쳐다보고 멀리서 슬쩍 웃던 큰 이모부가 그랬다.


발인이 시작되고 엄마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아버지는 막내사위라 영정사진을 들고 앞에 서있었고, 나만 엄마 옆에 서있었다. 큰 외숙모나 둘째 이모는 이미 통곡을 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화장된 유골을 지켜보았다. 직계 존속들만 모여 통곡하던 순간에도 엄마는 유골을 만져볼 뿐 조금도 울지 않았다. 마침내 운구행렬이 장지로 향할 때 버스에서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는 엄마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625 참전 용사였던 외할아버지 옆에 외할머니 유골함이 놓였다. 나이가 같은 두 분은 22년 만에 같이 자리했다. 엄마는 한동안 멈춰서 있었고, 제례실에서도 갑자기 세차게 내라는 비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마 나는 애도를 엄마에게 배웠구나 짐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딘가 엄마 닮은 얼굴들이 뭉실뭉실 떠다녔다. 가족이란 그 사회적인 의미나 서사를 제외해도, 누군가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발화점 같은 것이다. 나는 엄마의 애도가 나와 닮았다고, 그리고 언젠가 엄마 선 저 자리에 내가 서있겠다고 예감했다. 아버지를 다시 보니 사람들 앞에서 외향적인 척하며 애를 쓰는데, 그것 역시 내 안에 있다. 어찌 보면 내 조증은 부계요, 울증은 모계인지라.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과 딸들의 아들과 딸들을 보여주는 건 동생의 몫인 것도 같다. 문득 나는 이렇듯 이어져 있어 지독하게도 고립되었다. 언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취기를 빌려 기약 없는 문장만 여기저기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