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25.08.10)
이번 주는 조금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마주치는 모두 다 후려 패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덥고 덥고 또 더웠다. 학교는 13년째 공사 중이고, 여기저기 흙먼지 흩날리는 내 출퇴근길을 수라의 마음으로 걸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짐에 따라…”로 시작하는 문장은 내 논문을 포함한 이맘때의 모든 글을 관통한다. 너무 더워서 메모리가 날아간 탓인지 지난 일주일의 기억이 흐릿하다. 아마 과제 발표를 적당히 치러냈고, 물품 구매 담당 학교 직원과 입씨름을 했다. 너무 더운 탓에 퇴근 후에는 집 아니면 영화관에만 갔다. 러닝은 좀 해보려고는 했는데, 잘 안 되더라. 평양냉면은 세 번 먹었다. 술은 거의 먹지 않았다. 평냉 집에서 소주 몇 병 정도 먹은 것은 그냥 코스에 포함된 것이라 생각하여 카운팅 하지 않았다.
올해는 휴가는커녕 해외 출장조차 없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지난주에는 칼같이 퇴근하며 스스로를 좀 달래긴 했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놀고 싶다는 마음과, 이렇게 해서 졸업할 수 있겠냐는 이성의 목소리가 서로 충돌을 거듭했다. 정신 차리고 졸업요건을 확인해 보니 토익 850점이 필요해서 신청하고, 졸논(卒論) 주제를 대충 추렸다. 겸손한 연구자들이 스스로의 원고를 졸고(拙稿) 내지 졸논(拙論)이라고 얘기하곤 하던데, 내 졸논은 어떻게 보나 졸논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 계절이 끝나야 한다. 10월쯤 되어 가을 제주 바다에서 나는 거창한 제목과 그렇지 못한 원고를 붙잡고 발표자료를 만들고 있을까. 친구들에게 나눠줄 논문 인쇄본에 들어갈 나름의 소회를 적고 있을까. 글쎄, 모쪼록 졸업만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토익을 보려고 독립문 앞에 있는 대신고까지 갔다. 9시 20분까지 오라고 해서 택시 탔는데, 9시 50분에 들어가도 충분했다. 연필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쿠로미 샤프를 하나 사서 시험장에 들어갔다. 마킹 틀리지 않게 조심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지우개는 사지 않았다. 정확히 6년 전쯤 토익을 쳤던 것 같은데, 그때랑 똑같은 기분이다. 리스닝은 몇 개 잘 안 들리는 게 있었고, 리딩은 이걸 왜 틀리나 싶었다. 다만 6년 전의 점수는 반대로 나왔다. 어쨌거나 850점만 넘기면 되는데 알 게 뭐냐. 시험 끝나고서 홍상수 <강원도의 힘> 보러 서울아트시네마 왔다. 시네큐브-에무시네마는 뻔질나게 다녔는데, 여기는 <동동의 여름방학> 보러 왔을 때 처음 와봤다. 아닌가? 13년도에 경향신문 사옥올 때 와봤나? 민주노총 침탈때였나? 잘 기억이 안 난다. 지난 계절처럼 느껴진다.
100세 시대라지만 술 담배 다하며 인생을 한껏 즐기는 나는 100세는 무리지 않을까 싶은데, 아주 넉넉하게 잡아 80세까지 산다고 쳐보자. 그 인생을 사계절로 보면, 내 나이 서른둘은 이제 한여름을 지나 한 풀 꺾여 가는 시절이 아닌가? 조금 살만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여유는 가지지 못한 그런 시절인 것이다. 한여름 같았던 서른 살을 떠올리니, 한 풀 꺾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제법 든다. 제발 올해는 졸업했으면 좋겠다. 서울에 남아있지 않아도 좋으니 어디든 그냥 밥 벌어먹을 일자리 찾아서 깨끗하고 넓은 집에 가구 없이 누워 지내고 싶다. 아니지 큰 티비랑 좋은 오디오, 물 안 떨어지는 에어컨은 있어야지. 하지만 친구들 어깨너머 본 직장인의 삶이란 마냥 쾌적한 것은 아니라던데. 언제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가는 걸까. “허나 도피의 끝에 새 땅은 없지 늪이야 난 깊숙이 내 기둥을 꽂을 준비 하지 그 수표에 적힌 평온의 값 그게 얼마든 줄 테니까 내게 삶을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