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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힙합과 미소지니

1. 일탈의 예술인 힙합과  젠더의식


앤디 워홀은 “예술은 당신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예술은 종종 일탈과 결부된다. 특정한 의미체계와 사회질서에 반하여 행해지는 예술은 그 자체로 문제의식이 되고 담론이 된다. 비평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은 그를 통해 무한한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현실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탈이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욕망과 충동을 적절히 제어하는 일상의 도덕이었기 때문이다. 순전히 상상과 허구로 이뤄진 예술이라 할 지라도, 예술은 현실 어딘가에 발을 걸쳐놓기 마련이. 나아가 작품의 도덕적 결함은 종종 제의식을 흐리고 감상 방해하는 미적 결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송민호는 한국 힙합 내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를 격발시켰다.

우리는 이 글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방향성을 갖고 한국 힙합 음악 그 중에서도 랩문학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랩 가사는 그 장르적 특성 상 일탈과 폭력이 종종 등장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문제의식을 동반하지 않는 일탈과 폭력은 그저 야만일 뿐이다. 젠더갈등이 사회의 주요 논점으로 급부상한 지금도 여전히 한국 힙합 창작 주체는 남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몇 안 되는 여성 랩퍼들의 표현방식 또한 마초적인 언어를 답습한 것이 대부분이다. 렇기에 이 글은 특정 랩퍼들의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글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 가장 인기 있는 대중문화 하나인 힙합음악에도 젠더의 고민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그러한 바람과 함께 그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글이다.  


2. 한국힙합에 러들어온 여성


남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영감을 여성에 빗대거나, 여성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신의 음악에 투사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흔히 ‘뮤즈’라고 불리는 예술 영감으로써 여성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힙합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남성 중심의 힙합 문화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을 뮤즈로써 대하는 것은 빈번한 일이다. 뮤즈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논쟁 차치하더라도, 힙합음악이 여성을 다루는 태도는 다른 장르의 그것보다 조금 더 난폭하다. 그것은 평론가 강일권씨가 잘 지적하고 있다.


"왜 힙합 속에서 여성 혐오 및 비하 표현이 팽배했는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사회와 흑인 커뮤니티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먼저다. 인종적·계급적으로 사회진출이 철저하게 막힌 현실 속에서 주로 편모 가정에서 자라거나 혹은 아버지로부터 학대 받거나 버림받은 채 자라오며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흑인 남성들의 이야기 말이다.”(출처 | 주간조선 2372호)


강일권씨의 말대로, 힙합음악이 여성을 소비하는 맥락은 불우한 흑인 남성들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배경은 힙합 음악 특유의 문화적 성격과 함께 자리잡았다. 그것은 바로 힙합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디스와 스웩이다. 디스와 스웩은 랩문학에서 배틀랩이라는 장르를 발전시켰다. 배틀랩은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을 띄우는 랩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류 문화를 관통해 온 여성혐오를 엿볼 수 있다. 힙합음악을 발전시킨 남성들 역시 기존의 여성차별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 했고 여전히 남성성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배틀랩에서 상대를 비하 위한 목적으로 여성을 비하하 ‘bitch’ 나 ‘pussy’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또한 힙합  여성오적 표현은 이에 그치지 는다. 남성 랩퍼들은 여성을 그저 섹스의 도구로 여기며 물화시키기도 했다. 마치 비싼 차와 넓은 집처럼, 여성 돈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상품이 되어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아무런 고민 없이 한국힙합에도 흘러 들어왔다. 메세지에 대한 고대신에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모방 급급했던 것이다. 한국힙합 초창기 커뮤니티를 뜨겁게 했던 논쟁은 기껏해야 운율  형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정작 랩문학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충분하지 못 했다.

블랙넛은 선정적인 가사와 돌발적인 행동으로 큰 이슈가 되곤 했다.

그 결과 초창기의 한국힙합 아티스트들  상당수는 본토 힙합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으로 인해 폭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가사들을 써왔으며, 여전히 몇몇 래퍼들은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하고 다. 선정적인 가사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던 블랙넛은 그 극단적인 예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흔히 ‘루저’라 불리는 열패감에 시달리는 20대 남성이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금기시된 욕망과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예컨대 그는 ‘친구엄마’라는 곡에서 친구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담은 가사를 쓰고, ‘졸업앨범’이라는 곡에서는 여성을 강간하고 살인하는 내용의 가사를 썼다. 그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욕망은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뒷받침한다. 여성의 물화는 기본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을 여성을 향한 수평폭력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저 상상으로 이뤄진 가사라 할 지라도 이러한 가사들은 여성들을 힙합의 창작 주체로 설 수 없게 가로막는 것뿐만 아니라 소비하는 여성들에게도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랙 올해 발표한 'Indigo child'라는 곡에서 다시   동료 래퍼에 대한 성희롱 가사로 물의를 일으킨다. 블랙넛이 몸 담고 있는 크루의 이름은 ‘Just Music’이다. 그들은 이러한 표현 방식 또한 그저 음악이라고 이야기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현실과 완전히 독립된 음악 같은 것은 없다.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호흡할 수 없는 껍데기뿐인 예술은 공허할 뿐이다.


3. 교묘하게 객체화되는 한국힙합  여성


물론 블랙넛과 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도, 힙합음악은 여성에게 쉬이 주체성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힙합 음악 내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객체화 된다. 앞선 강일권씨의 분석은 힙합음악에서 여성에 대한 강간, 살해 등의 폭력적인 가사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왜 힙합음악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는지를 다루기에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가사들을 넘어, 그 기저에 담긴 소지니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의 도구로써 페미니즘이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bitch’나 ‘pussy’가 들어가는 가사를 검열하는 것에서 그쳐선 안 된다.


남성 랩퍼들이 여성을 객체화하는  수없이 널려있.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예로 버벌진트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앨범인 ‘누명’은 교묘하 우아하게 여성을 객체화하 있다. 이 앨범은 큰 맥락에서 박해 받는 메시아 버벌진트를 다루고 있는데, 버벌진트 스스로를 한국 힙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구원자라 이야기하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자신감은 앨범의 여기저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역사의 간지(奸智)’ 에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역사적 반동세력’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의 유년기를 다룬 곡에는 ‘1219 Epiphany’ 라는 제목을 붙인다. ‘Epiphany’라는 단어 예수의 출현 내지 현현을 의미하는 종교적인 단어임을 생각해   그가 동일시 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름아닌 예수임을   있다. 애당초 버벌진트는 2집 누명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소개했다. 즉, 이 앨범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하는 최후의 만찬과도 같다.

버벌진트의 2집 '누명'의 표지에서 우리는 박해받는 예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청자를 여성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앨범의 도입부인 ‘망명’은 헤어지는 연인간의 마지막 섹스를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곡에서 그가 말을 걸고 달래며 애무하고 있는 대상은 한국 힙합 그 자체다. 앨범 후반부의 ‘leavin’ 역시 같은 구성이다. 피처링으로 참여한 다른 랩퍼들 또한 버벌진트와 같은 방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당연히 곡의 여성들은 메시아적 존재인 버벌진트가 그녀(힙합)를 떠나려 함을 아쉬워하고, 눈물로 그를 붙잡는다. 버벌진트 또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만날 것이라 거짓말을 한다.


“‘This is not the last day' I said,

but 시간이 왔어. 인사를 해야 돼.

마지막 거짓말을 해야 돼.”


앞서 언급했던 곡들에서도 그의 인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219 Epiphany’라는 곡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곡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내 걱정관 달리 천여 명이 환호해

It was so spiritual, I thought it was 교회

다음날 아침 조회부터

여자애들이 내게 말 걸었어 like 'Hey, What's up?'”


신도들이 신의 이름을 호명하듯, 버벌진트는 관객들이 자신에게 환호하는 경험을 교회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은 다름아닌 여성들의 인정이다. 버벌진트는 무대에 올라서며 겪었던 자기초월의 감정을 여성을 매개체로 되새긴다. 스스로가 알파메일임을 주장하는 맥락에서만 여성이 객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훨씬 영리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여성을 객체화하고 있다. 그는 여성을, 한국 힙합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연인간의 에로스적 사랑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사랑은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의 뒤틀린 형태다. 그는 한국힙합 자신 없이는 발전하지  했을 거라 단언한다.


“This artform, someone’s gotta take it to higher ground.”


그가 계속해 한국힙합을 여성 빗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의 여성 대한 인식도  정도는 유추  있을  같다.


4. 주체성을 잃어버린 여성 래퍼들


버벌진트의 예 알아보았듯이, 남성 랩퍼가 여성을 객체화하는 방식은 보편화를 넘어 고도화 었다고   있을 정도. 남성 화자에 의해 창작된 예술에서 여성이 객체화되 다는 사실  어쩔  없는 것처럼 보일  있다. 하지만  힙합 음악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랩퍼들이 한결같이, 여성을 객체화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 야기시킨다. 여성을 주체적으로 대하는 시선이 사라진 장르에서, 여성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침묵의 나선이론이다. 이는 독일의 여론조사기관인 알렌스바흐 연구소 설립자이자 소장이었던 노엘레-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이 1971년에 가설을 설정하고 1974년에 공식적으로 제시한 심리이론이다.


‘침묵의 소용돌이’ 또는 ‘침묵의 나선’은 사람들이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의 의견을 감추어야 한다고 느끼는 점차적인 압력을 뜻한다. 특히 현재 한국 힙합의 상황처럼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무비판적인 관성에 휩쓸려 있을 때 더욱 유효하다. 즉, 자신의 의견과 시선이 확산되고 다른 사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자신 있게 그 의견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터전을 잃고 있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개인들은 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국 힙합에서 여성 랩퍼들은 더욱 상황이 좋지 않다.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넘어서, 남성 랩퍼들의 시선과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이스와 키썸의 '성에 안차'는 "스스로 형편없는 실력을 인지하지 못한 랩퍼가 어설픈 비판정신을 장착했을 때 나오는 민망한 곡의 전형"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 극단적인 예 하나가, 제이스와 키썸의 ‘성에 안 차’다. 이들은 ‘언프리티 랩스타’라는 여성 랩퍼 서바이벌 티비 쇼를 통해 이름을 알린 랩퍼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많은 백을 갖고도 (성에 안차)

옷장에 꽉 찬 옷을 보고도 (성에 안차)

그렇게 멋진 남자를 만나도 (성에 안차)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고 성에 안차”


이러한 인식은 참담할 지경이다. 이는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김치녀’ 등의 여성혐오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더욱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사에 따르면, 비싼 외제차와 비싼 시계를 사고 매일 밤마다 여자친구를 바꾼다는 남성 랩퍼들은 괜찮지만, 여성 랩퍼들은 백이나 옷을 사고 남자를 만나는 것에도 정도껏 해야 하는 것 같다. “어딜 여자가~”하고 이어지는 전근대적 남존여비 사상이 담긴 가사가, 21세기 젊은 여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물론 그녀들이 반드시 사회의 젠더 양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거나, 투쟁의 메시지를 담을 이유는 없다. 다만, 스스로의 젠더 주체성을 내다버린 음악은 개인의 욕망에도 충실하지 못 한 음악이다. 그녀들 또한 ‘침묵의 나선’에 휩쓸려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기존의 힙합 음악, 그 안에 내재된 미소지니는 여전히 유효하며 장르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은 관성 속에서 굳어져 왔으며 쉬이 깨질  같지도 않다. 한국 힙합 랩문학  마초적인 감정의 독재 눈에도 보이나 결코 깨진 적 없는 검은 천장과도 같다.


5. Friend; best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한국 힙합 랩문학에서 여성혐오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분포해 있다. 여성혐오 범죄를 연상케 하는 남자들부터, 여성을 교묘하게 객체화하는 남자들도 있다. 이런 스펙트럼 속에서 여성은 주체성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그들의 문법을 답습하고 있다. 그들의 다양한 모습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한국 힙합 음악은 결코 젠더적으로 평등한 음악이 아니며, 여성이 어디까지나 제 2의 성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힙합 음악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지난 세월 이러한 검은 천장을 인지하면서도 무시했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왔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 를 통해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며 문화적 차별성을 보여주었듯이, 힙합은 언제나 시대정신과 유행을 늘 곁에 두며 발전해왔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가 문화 전반으로 퍼져나가며, 더 이상 여자 아이돌들이 ‘여자는 쉽게 마음을 주면 안 돼’ 따위의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 변화의 첫걸음이 힙합 음악일 수 있다. 그것이야 말로 랩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야기하는, 혁명이고 변화 진정한 모습이다.

 

MC가 진정한 거리의 지휘자가 되고, Move the Crowd라는 그들의 별칭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힙합 속에 내재되어 있다. 다름 아닌 respect다. 그 존경과 존중의 마음을 여성들에게도 개방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그 개방은 이제껏 누려왔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함을 의미한다. 달라진 랩퍼들의 가사와 시선은 더 많은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고, 스스로를 대표하는 여성들에 의해 다시 한 번 그 레벨을 끌어올릴 것이다. 그렇게 힙합에 내재된 여성의 신화는 어느 날 갑자기 소멸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 랩퍼들 자신이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면 나갈수록, 물화되고 객체화되던 그녀들의 특질은 점점 사라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여성 랩퍼들은 계속해 등장하고 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처럼, 이제 페미니즘은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시대정신으로 부상하고 있다. 얄팍한 팬덤 안에 숨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힙합은 결국 한 때의 유행으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루페 피아스코의 Bitch Bad

시몬  보부아르 그녀 저서, 제 2의 성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이 주어진 현실 세계의 한가운데에 자유의 지배를 도래시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 힙합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미국의 랩퍼, Lupe Fiasco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만을 문제 삼으며 그의 곡 ‘Bitch; Bad’에서 “Bitch; bad, Woman; good, Lady; better”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Human; best” 혹은 더 나아가 “Friend; best”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빠뜨렸다. 한국 힙합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그 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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