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언젠가 밤에 밖을 서성이다가 수박이 먹고 싶어서 24시간 열려있는 무인 과일가게에 들어가 수박을 한 통 샀다. 8kg짜리 수박을 4만원 주고 사면서 이게 맞나 싶었지만, 그냥 샀다. 바로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 달다는 여름을 냉장고에 넣어 복수하듯 차게 식혔다. 가끔 생각나면 한 조각씩 잘라먹었는데 2주가 넘게 지난 지금도 다 먹지 못했다. 비닐랩이 보우하사 다행히 수박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러닝을 하고 돌아와서 한 조각 썰어 먹고 숙취가 남은 아침에 갈아 먹곤 했다.
오늘은 판교 출장을 갔다가 한 번 러닝하고 먹을 정도만 남겨두고 전부 썰었다. 수박 썰 때 가장 힘든 것은 그 달콤한 향을 맡으면서도 한 입 베어물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닐까? 몇 번 베어물고 정신차려서 접시에 한 그릇 담아보니, 이런 호사도 누리는구나 싶어 문득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수박을 먹으면서 볼 영화도 골랐고, 이제는 영화 한 편 보고 자면 그만이다. 어찌저찌 이 계절을 또 살아냈다.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수박을 한 통 사서 먹어야겠다.
계절이 수박만 같으면 좋으련만, 슬픈 생각 조급한 마음이 죽은 사람의 외마디처럼 거듭 돌아온다. 아닌가. 산다는 것도 반복일까. 이미 떠난 사람에 마음을 묻어두니 그게 계절처럼 돌아오는 걸까. 여름이 얼른 갔으면 하는 마음과 가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꾸 부딪힌다.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 까닭은 이미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내 마음 상당 부분이 작년 삿포로의 2월과 도쿄의 9월, 아니면 올해 전주의 5월 그것도 아니면 재작년 교토의 4월, 이런 곳에 묻혀져 있다. 자꾸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역마살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다시 영화를 골라 들어야 할 때라는 뜻일까?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 아니지 아니지, 먹고살만하고 비천하고 멍청하고 방탕하니, 나는 흰 바람벽 대신에 32인치 모니터를 켰다. 수박이 두 조각 남았지만 배가 터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