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징역
아무튼 고생하셨다. 어차피 하루쯤 지나고 머리 식은 후에 사법부의 안일함을 논해도 그리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이런 일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을 모아 한 잔 먹고 고생들 했다고 말을 나누는 버릇을 가지자. 여전히 그날 밤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힘든 공포라는 점에서 SF 호러의 장르적 성격을 띈다. 그 밤에 대한 명확한 설명같은 것은 검찰의 논고나 재판부의 판결문 어디를 봐도 불가능하다. 그냥 우리는 그런 체제를 살고 있고, 그 체제가 겪을 수 있는 불운한 시기를 지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 체제가 적당한 매듭을 짓겠다고 나선 오늘, 일단 한 잔 마시고 서로를 위로해도 괜찮다.
그 날 여의도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는 평생의 동지로 여긴다. 언젠가 서로 연락이 닿지 않고 1년에 한 번 보는 것이 어려워져도, 나는 당신들의 삶을 응원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것은 니가 그 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토록 횡설수설하는 A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빠져나온 B가 담배를 달라는 것도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시민들의 단일대오…라기엔 딱히 통일된 구호도 없었다. 그저 들끓는 마음들과 설마하는 눈빛들, 그 사이에 불안과 공포가 스프레드처럼 발려있었다.
그 이후 다시 광장엔 사람들이 모였다. 얼빠진 늙은이들과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 남태령이 어쩌고 광장이 어쩌고 새로운 시대가 어쩌고 했다. 그게 개좆같은 소리라는 걸 나같은 놈도 17년쯤 깨달았는데, 감히 비애도 없는 광장 주제에 새시대를 자처하는 꼴을 보면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그 중 몇몇은 이제 마이크로파시즘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입에 붙지도 않은 동지가 어쩌고 연대 시민이 저쩌고 지랄병을 떨고 있다. 이렇게밖에 말못해 미안하지만 늙은이들은 보다 본인 삶에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란다. 선배님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시지 않았나? 그 긴 세월 이뤄지지 않았던 세상이 남태령 한큐에 오리라 믿는 게 대관절 뭔 놈의 진보정치란 것인지.
물론 내일도 세상의 비참은 여전할 것이다. 제 삶의 불행을 직시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아우성을 벌일 것이다. 엘리트들은 늘 그랬든 제 살길만 찾을 것이다. 예술은 비겁해지거나 자기 만족에 빠져버릴테고, 지역성을 얻지 못한 담론이란 그저 무색무취한 기체가 되어 휘발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 인류는 점차 종으로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그 개체인 우리 하나하나 어제보다 더 쳐진 어깨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래도 이런 날엔 술을 한 잔 먹고, 그래도 공화국이라는 것이 마냥 파이는 아니었나보다 얘기하고, 노벨평화상 타면 이젠 나도 김대중급인가 생각해보면서 하루를 마감해도 좋은 것이다. 공화국의 인민들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날이다. 분개할 날은 앞으로 존나게 많으니까, 일단은 그냥 한 잔 먹고 출근이나 하자. 모처에서 다들 좋은 술 한 잔 먹었길 바란다. 그게 절대 무책임한 마음은 아니라고 서로를 좀 위로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