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 여의도 텐트에서
성북천
성북구 북악 줄기 구준봉 기슭에서 발원하여 청계천과 합류하여 중랑천으로 흐르는 하천. 안암천 혹은 안감내라고도 한다. 앉아서 쉴 큰 바위가 있었다는 안암의 지명 유래보다 왠지 모르게 도성의 북쪽이란 뜻의 성북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잠시 쉬어갈 곳이야 큰 바위뿐 아니라 지친 몸을 앉힌 그 어디여도 상관이 없어야 마땅하지 않나. 오히려 도성의 북쪽, 그리하여 성곽이 품지 못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 가장자리의 미학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라 여기니 안암천이나 안감내보다는 성북천이 더 좋겠다. 말로만 전해 들은 북정마을이나, 술이나 퍼먹던 제기시장이나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성북천은 왠지 느린 사람들이 살아간다.
어찌 보면 나는 적당히 너절하고 적당히 눌어붙은 이 공간들을 패션으로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 삶이 내 삶이라 여기기엔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고, 그냥 오가는 것만으로 침묵하는 일상에 말을 걸었다거나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 그렇다. 이제는 시절이 흘러 조상들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성북동의 비둘기들이 나보다는 성북천의 삶에 가까운지 모른다.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
그럼에도 줄곧 나는 성북천에 세 들어 산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 공간 속에 나를 끼워 넣고 싶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녹아들진 못했으나 내가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이곳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자신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그 끼워 넣고픈 욕망에 충실하여 성북천에 세 들어 산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 언설에 충실한 삶을 살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키비의 말을 조금 비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각기 다른 화분 속에 살아갈지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햇빛은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을 이야기하며, 나는 다분히 감성에 기대어 글을 적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가을 오후의 나른한 볕과 사람들이나, 겨울 새벽의 새초롬한 물빛, 봄의 차분한 벚꽃과 여름의 싱그러운 나뭇잎이 왜 좋은지를 설명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마땅히 찾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종종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정말이지 나는 좋은 것에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연히 그러한 것을 논증하기란 게으른 내게 있어 시끄럽고 귀찮은 일이다. 논증은 이곳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노부부가 운영하는 중국집이 미디어에 의해 몇 번 방송을 타더니 왜 더 이상 계란후라이를 줄 수 없게 되었는가와 같은, 사소하나 분명한 훼손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여의도 국회 앞 텐트에서 나는 이곳을 왜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떠올리면서도, 바로 뒤따르는 물음 – 왜 우리는 연대해야 하는가 – 에는 굳이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은사가 지난밤 술에 취해 한바탕 교육을 펼친 실천, 우정과 같은 가치들이 포함된 시민정신의 영역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감성의 영역인지 모른다. ‘어떻게 볼 것인가?’ 보다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고, 우리는 그에 대해 끊임없이 논해야 한다. 아니, 이는 논의보다는 행동에 어울린다. 말뿐인 공동체를 집어치우고, 저변을 확대하며 단절된 경험세계들을 이어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리와 혐오를 경계하는 일이다. 북악산 자락부터 시작된 이 냇가에 찡그림없이 몸을 맡기고 걷는 일이다.
물론 삶의 방향에 대한 명확한 답변 역시 내게는 아직 어렵기만 하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 냇물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혹은 답변을 찾아가는 길에서 좁은 경험세계에 갇힌 채로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연대의 가치를 주장하는 나만의 독재자가 되어 시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운이 억세게 좋은 탓에, 동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고 질문은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시작과 중간, 끝 어디여도 상관없을 약속의 장소를 되짚어본다. 언젠가는 꼭 이 성북천을 같이 걸으리라. 안암교에서 시작한 여정이 한성대까지 이어지고, 그곳에서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북정마을과 만해의 심우장에도 다녀오리라. 삶을 질투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고, 인간을 혐오하는 모든 기제에 손사래를 치며, 뭉쳐진 주먹을 풀어내어 손을 맞잡게 하는 약속의 장소. 그게 내겐 성북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