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졸이며
요즘은 할머니와 함께 사시니 어떤 지 모르겠다만, 우리 가족은 일요일 아침 겸 점심으로 종종 라면을 먹었다. 찬밥이 있거들랑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고, 그렇지 못한 날엔 국수를 더 넣어 먹었다. 어머니는 계란 노른자의 비릿한 맛이 싫다하여 계란을 터뜨리지 않은 채로 끓였고, 아버지는 당신의 사회 초년생 시절을 기억하며 계란을 휘휘 저어 끓였다. 물론 당시의 나는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흰자만 풀어 끓이면 어떨까 하는 제언을 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적응이 되신 탓인지 군소리 없이 라면을 드시는 두 분을 보니, 계란에 관한 비법은 나 혼자 알고 있어도 무방할 듯 싶다.
라면이나마 경험세계를 넓힐 수 있었던 때는 사병 시절이었다. 당시 부대에는 신기한 부조리가 몇 개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첫 근무를 다녀온 신병의 라면을 사수 - 2인 1조 근무 시 선임병, [싸수]라고 한다 - 가 미리 사주는 것이었다. 그게 뭐 부조리냐 한다면 나도 당시 갸우뚱 했으니 할 말은 없다. 다만, 계룡대의 높으신 분들이 병영 부조리라 하시니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물론 근무 후 부사수 -2인 1조 근무 시 후임병, [부싸수] 혹은 [쪼수]라고 한다 - 가 라면을 전부 끓여오는 것은 부조리가 맞기야 하다. 특히 비빔면을 끓일 적에 찬 물에 세번씩 헹구는 일은 제법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군용 육개장이야 그저 아침으로 소고기무국이 나오면 스프를 하나 챙겨가는 용도였고, 내 최애 라면은 따로 있었다. 국물을 남기면 버리러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나는 간짬뽕을 주구장창 먹었다. 짜장라면류와도 잘 어울리고, 스파게티류와도 잘 어울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충성마트 이용자는 없을 것이기에 안타깝지만, 새우볶음밥이나 햄볶음밥과 함께 국물 살짝 남은 간짬뽕을 비벼먹는다면 행보관도 부럽지 않다. 그렇게 21개월, 김 모 소령을 위시한 장교들에 대한 적개심 - 민원과 욕설 문자로 약간이나마 해소했다 - 과 '딩딩이'란 이름의 기타 - 여전히 '황혼'밖에 못친다, 그것도 더듬더듬 - , 마지막으로 마음 속에 간짬뽕을 새기고 나는 사회에 돌아왔다.
돌아온 이후로 일본식 라멘은 좋아했으나, 좀처럼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이진 않았다. 자취 초반의 열정은 매 끼니 찌개와 밥을 고수하는 열혈 자취생으로 날 이끌었다. 요즘도 찬장을 열어보면 대체 내가 왜 녹차가루 같은 걸 갖고 있나 싶어 아리송하다. 작년 여름에 그린티라떼를 대접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아무튼 열정이 꺽인 여름쯤부터 그 찬장은 진라면 매운 맛 정도는 갖추고 있다. 해장국 살 돈이 없다면 다진 마늘, 청양고추에 콩나물 조금 넣어 후루룩 넘겨버린다. 그리고 배를 문지르다 잠에 든다.
오늘은 간만에 라면을 끓였다. 물을 반 조금 안되게 붓고 스프를 또 반만 붓는다. 물이 졸아갈 때 쯤 계란을 얹고 뚜껑을 덮어 1분을 더 졸인다. 파를 썰어 넣고 대충 휘적거리며 먹는다. 자극적인 첫맛에 이어 다 먹고나면 찌뿌둥한 뒷맛이 남는다. 그러고 보면 이게 아주 맛있는 요라라고는 절대 못하겠다. 그런데 가끔 아이돌과 팬들의 관계로 나와 라면을 설명할 수도 있는 것 같다. 'Brand New'에 열광하는 신화창조 회원들이라 하여 미감이 13년 전의 것이겠는가. 라면은 어릴적 혹은 사병시절 최고의 아이돌이었고, 나는 그의 팬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라면을 먹는다 하여 목구멍으로 라면만 넘어가는 것은 아닐테다. 추억이랄지 사연이랄지 뭐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내가 혀끝을 맴도는 라면의 맛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혀끝도 라면도 아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