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6.11.22)

재평가

by 취생몽사

16년 가을, 내 나름의 시대정신을 뽑아본다면 '재평가'쯤 될 것 같다. 언론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토요일 저녁이면 사람들은 촛불을 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바둥대고 있었다. 그렇게 매주 일어나는 재평가 속에서 더 이상 분노할 감정이 남아나지 않아, 나는 설거지 하지 않아 눌러붙은 냄비바닥처럼 뻣뻣해졌다. 어느 시인은 시가 쉽게 쓰여져 부끄러웠다는데, 나는 당연한 정의의 울부짖음에도 쉽사리 동의하지 못 하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글도 쓰지 못 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다는 것은 또 아닌 게, 사실 무척 잘 지내고 있다. 담배가 조금 늘었고, 잠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만 빼면 신나는 나날이다. 사실 오만과 편견으로 많은 사람들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재평가를 거치니 유난히 반짝반짝한 사람들이 되었다. 녹여준다면 녹아들어갈 마음가짐을 다시 찾았고, 분노나 복수심 같은 것도 이젠 잘 느끼지 못 한다. 얼마 전, 그토록 증오하던 군역 시절 간부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봤는데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아서 그냥 차단해버렸다.


작년 이 맘 때 썼던 글에는 '자격상실' 같은 제목이 붙어있는데, 장족의 발전이라 해야 할 것도 같다. 이제 나를 괴롭혔던 울적한 기억은 내 차분한 잡념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노이즈 캔슬링일 뿐, 솔직히 말해 굉장히 활기찬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다. 실제로 "히키코모리 아들이 집 밖에서 노는 것을 보는 기분이야." 같은 말도 들었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언제고 써먹을 것 같아 기억해두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전민희의 <세월의 돌>에서 여주인공은 "돌아보면 힘든 것만은 아니었어. 그치?" 하고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서야 써먹게 되었구나. 이제야 그 대목을 재평가한다.


사람이 더 깊어지기는 커녕, 여전히 '어데가 내 몸 누일 데요' 하고 있자니 조금 답답도 하다. 이런 나를 몇 년째 지켜보는 이들의 맘이 어떨지 상상만이 가능할 뿐.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을 '인생은 일상 벡터의 합' 이라고 내 멋대로 풀어서 생각해 보니, 출발점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벽에 먹은 국밥집 쿠폰도 가져다주리라. 고작 쿠폰으로 재평가 받기에 그 간 받은 도움이 크긴 하지만, 뭐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봐야하지 않겠나.


7시간 후면 퀴즈를 봐야하는데 이제 공부를 시작한다. 연습문제를 꾸역꾸역 삼켜보자니, 벌써부터 뻐근한 어깨와 목을 부여잡고 누가 안마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안마기를 검색하니 '안마왕 어깨안마기'라는 제품이 내 방세의 절반이 조금 넘었다. 뻐근함을 재평가해보기로 했다.


역시 괜찮은 것 같다. 말했잖은가. 나의 시대정신은 재평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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