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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1년

근황(17.01.27)

자취 1년

 얼음장, 어제 새벽 방에 들어섰을 때 내가 처음 떠올렸던 단어는 얼음장이었다. 13도는 잠을 자기에 적당한 온도는 아니다. 언젠가 이런 경험이 있었나 생각해보다가, 이 방에 살기 시작한지 1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1년 전 처음 계약하던 날, 술에 취해 얼음장 같은 방에서 대충 잠을 청했다. 아마 그 때 나는 조금 외롭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차가운 방이라지만 따끈한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를 했고 해가 뜰 때쯤 잠에 들었다. 10시간도 넘게 잠에 빠져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쉬겠다는 생각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뒹굴거렸다. 날이 어둑해지자 곧 호주로 떠난다는 친구를 만나 술도 마셨다. 비는 구슬프게 내렸다지만, 딱히 걱정할 일은 없었다. 

 작년 이 맘때, 이 방에 들어서며 처음 썼던 글의 제목을 기억한다. '역시 내 자취적응기는 어딘가 잘못됐다.' 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슬퍼했고, 기뻐했고, 사랑을 했다가, 성북천을 뛰었다. 그리고 그 모두를 합친 시간만큼 짜증을 내곤 했다. 어제 문득 깨달았던 것 하나는, 내가 전역 후 꽤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핸드폰을 바꿔버리며 500명이 넘는 전화번호를 100명 남짓 줄여버리곤, 최소한의 사람들만 만나며 열정은 다 팽개친 채로 살아가곤 했다. 누군가를 보며 내뱉는 말이 전부 "개새끼들 다 뒈져버려라~"라는 식이었기에, 언제나 술잔을 가까이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일상은 한번 알콜이 묻었다 말라버린 알콜솜마냥, 겉은 뻣뻣하고 여기저기 술냄새가 났다. 상처를 소독하기엔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잘 산다. 술은 여전하다만, 가끔씩 배시시 웃으며 깨기도 한다. 누군가를 보며 하는 모든 말이 사랑한단 뜻 같아서, 쉬운 인삿말에도 쑥쓰러워 한다.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연을 맺고 다닌다. 가끔씩 1년 전 방에서 침전하던 어린 아이가 눈에 밟히기는 한다만, ~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어떤 이들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마음에 든다. 얼마 전 학생회를 시작하며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툴툴거리는 것은 잠깐 미뤄두려고 한다.


 "I deserve someone better." 하고 속삭였더니, 삶은 어느새 저만치 내달려갔다. 편견, 오해, 재평가를 통한 인연의 재구성 속에서 나는 내가 못난 사람이라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시간이 얼길 바라던 지난 겨울에 비해, "내가 손 발에 열이 많아." 하고 너스레를 떨며 누군가의 얼어붙은 시간을 녹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얼음장 같은 13도의 자취방에서도 별 무리없이 자고 일어난 날에, 이제는 바뀌어버린 섬유유연제의 냄새를 맡으며 향초에 다시 불을 붙였다. 너저분한 자취방을 둘러본다면 누구나 나의 자취생활은 어딘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것만 같다.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처지다. 그걸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실은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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