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6.03.31)

이제는 찾지 않는.

by 취생몽사

단골가게가 생겼다. 4년 전 새내기 때도 그 라멘집은 있었다고 한다. 나름 이 근처 맛집들을 섭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방심했던 것이다. 처음 가본 것은 한 열흘쯤 되었을까 싶다만 그 이후로 3번을 더 갔다. 주거 빈민 자취생, 그 주머니 사정이 한심한 나날이다. 그런데도 열흘에 4번이면 꽂혀도 단단히 꽂힌 거다.

저녁도 못 먹고 과외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식사 시간을 놓친 때라면 발걸음은 어김없다. 개구쟁이 같은 어지러운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누가 쫓아오는 것은 아닌데도 심박수가 높아짐을 느낀다. 어느 순간 라멘 가게 쿠이도라쿠 문 앞에 선다. "이럇샤이~ 어서 오세요!" 지구촌을 실감케 하는 난해한 인사말이 쏟아지고, 라멘을 정하고 안내받은 자리로 간다.

가게 이름은 식도락(喰道楽)이지만, 이 곳의 메뉴는 라멘뿐이다. 내 18번은 매콤 돈코츠 라멘이다. 조금 출출하다면 차슈를 추가해본다. 금세 나온 라멘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일까. 재잘대는 쪽파들이 송송송, 수줍은 차슈가 슬쩍, 덩달아 계란 반숙도 퐁당, 인상 좋은 숙주가 한 움큼 올려져 있고, 민망한 김 한 장이 뻘쭘한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잠시 탄식을 하다가, 퍼뜩 정신과 함께 젓가락을 들어 올린다.

마늘을 듬뿍 넣고 국물을 들이켜본다. 적당히 진득하고 적당히 느끼하다. 혼자서 먹는 날도 문제가 없다. 주방 바로 앞쪽 테이블의 자리에서 먹는다면, 라멘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이 곳엔 라멘과 나만 존재한다. 우리들의 대화는 테러방지법 할아버지가 와도 읽어내지 못 할 것이다. 매콤 돈코츠 라멘, 차슈 추가 7000원, 아니 현금결제는 6500원이다. 6500원에 나는 이렇게 뿌듯해진다. 대통령은 이 사람들을 공천하길 바란다. 결코 나를 배신한 적 없는 이 국물 맛은 진실한 사람들의 맛이다.

식사권을 걸고 한 달에 20명을 뽑는다는 설문지를 고민하며 작성한다. 심금을 울리는 한 마디가 필요하다. 아아, 내게 원고지를 주세요. 1000자라도 쓸 수 있습니다. 제가 히키가야 하치만은 아닙니다만, 저는 문과 계열 과목도 우수했던 공대생이란 말입니다. 주거 빈민의 설움을 녹여보기로 한다. "밖에서 밥 먹을 때마다 쿠이도라쿠만 오고 있습니다. 꼭 뽑아주세요."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안쓰럽다. 만족하며 설문지를 접어 함에 넣었다.

서울시가 인정한 낙후된 대학가, 안암골이다. 윈-윈을 위해 개발사업을 한다고 하던데, 그 윈-윈에 나는 비켜서 있는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아무래도 젠틀하지 않단 말이다. 대학가임에도 '골' 자를 붙이는 이 동네가 나는 좋다. 그 와중에 상권에서도 벗어나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 라멘집이 나는 좋다. 가게를 나설 적마다 누군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언젠가 가게도 문을 닫고, 네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씻겨나가겠지." 나 대신 피타입이 대꾸한다. "적어도 오늘은 아냐."

아직 그 라멘집은 육수를 끓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위안이 된다. 거 참 힐링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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