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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48대 왕인 경문왕에게는 대나무숲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임금님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한국판인데, 왕위에 오르자 귀가길어진 경문왕은 모두에게 이를 숨겼고, 두건을 만들던 장인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장인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의 대나무숲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치고 생을마감했다고 한다. 그 후로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선 "우리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왕이이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는 일화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나무숲’은이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SNS 상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숲’은 위키위키 형식의 ‘대나무숲’들이다. 위키위키는 문서의 편집 권한이 임의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웹사이트를 의미한다. ‘위키피디아’ 등의 웹사이트가 대표적인데, 누구나 참여하여 지식이나 정보를 구성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나문서 훼손은 이용자 스스로가 고쳐나간다. 일종의 집단지성인 셈이다.SNS 상에서 등장하는 ‘대나무숲’의 가장 대표적인것은 'OO대학교 대나무숲'과 같은 형태인데, 이용자들이 교내문제, 연애, 학업, 진로 등 다양한 방면의 고민들을 익명으로 투고하며, 공개된 계정을통해 많은 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곤 한다.
‘동성애’와같은 소수자에 대한 의견들, 등록금 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안들, 하다못해 개인의 연애와 이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유의미한 토론과 새로운 만남의 장이 생겨난다. 그중 상당수가 가벼운 일상에 대한 잡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얼마 전 모 대학교‘대나무숲’을 통해서, 한여성이 같은 과 학우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이 되기도 했고, 다른 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서 해당 학과의 잘못된 군기 문화에 대한 고발이 이뤄지기도했다. 일상에서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사안들이, '대나무숲'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공론화되고 있다. 피해자, 약자, 소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현실적 상황이 그려지기도 하고그러한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교실마다 에어컨이 설치돼 있었지만 한번도 가동된 적이 없었다. 반면교무실은 항상 쾌적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쩌다 교무실 앞을 지나칠 때면 출입문 틈새로 나오는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곤 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더니, 정작 에어컨은 교사들에게만 제공된다니!' 그 날 나는 다소 격앙된문장을 사용하여, 교장실에 이른바 ‘투서’라는 것을 써서 보냈다. 다음 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버릇없는 학생 하나가 감히 교장실에 투서를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제보로(그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과꽤 오랫동안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격앙된 문장에 대해 둘러대기 위해 당시 읽던 무협지의 폭력성을거론하는 비겁한 짓을 해야 했다. 요즘 ‘대나무숲’을 지켜보며, 그때도 ‘대나무숲’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물론 ‘대나무숲’에는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보자의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제보가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는지 아닌지를 쉽게 판명할 수 없다. 악의적인 소문과 비방을 목적으로 ‘대나무숲’에 제보를 한다면, 처음의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날 수도 있다. 또한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제보의 최종 채택은 관리자들에의해 이뤄진다. 사연을 채택하고 관리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소수 관리자들에게 맡겨져 있으므로, 관리자들의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만일 관리자의 편향된 시선이 개입된다면, 원래의 취지에 맞지 않는 내용이 집단지성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일례로, 모 대학교 ‘대나무숲’에서는 어떤 과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글을 관리자가 제멋대로 훼손하고 댓글로 비방하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많은 학생들의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해당 대나무숲은 해당 관리자를제명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대나무숲’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관리자를 규제하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뿐이고,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도 충분히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우리가 겪게 되는, 가장 근본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 중 하나가, 표현의 자유와 익명성의 보장에 관한 것일 테다. ‘대나무숲’은 이러한 갈등이 가장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공간이라 할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갈등이 헌법상의 조항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상황으로 논의된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갈등 없이 토론과 합의는 이뤄지지 않으며, '인류애'라는 전제하에 빚어지는 수많은 갈등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을, 규제되거나 정화되어야 할 사회악으로 바라본 홉스가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야만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낸 것은 단순한 과학의 발전만은 아니었다. 더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전파해온 인류의 역사가, 과학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지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소수자와 다수자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입장벽이 낮고, 표현의 쌍방향이 보장되는 디지털 문화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민주주의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힘 있는 자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사자후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수많은 민중들의 작은 속삭임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 힘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자체를 팽창시키며, 그 팽창에는 중심과 가장자리의 구분 또한없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대나무숲’들이 더욱 많아질 적에 우리는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