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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동네, 낯익은 골목

근황(17.08.01)

버스에 올라타 한 눈을 팔다가 정류장을 놓치고 마는 것은 내 멍청한 버릇 하나다. 그러나 32도를 넘긴 오후 2시에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버릇을 넘어 비극이 되어버린다. 퀘퀘한 월곡대교 아래를 걸으며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끝없는 더위, 끝없는 시련은 고작 카톡 답장 몇 번 하느라 감수해야 하는 몫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렇게 돈암1동 주민센터에 내려 다시 학원이 있는 종암동으로 향했다. 길을 걷다 청소년 통행 금지 구역이라 쓰여있는 골목을 마주쳤다. 아, 그런가보다 하려다 느낌이 이상하여 녹턴 앨리로 향하는 프레드와 조지마냥 골목에 들어섰다. 사실 나는 청소년도 아니긴 하다. 아마 이 곳은 집창촌이라 불리는 곳일 테다.

난 이 광경이 아주 낯설지는 않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는 수원이고, 수원역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집창촌이 있다. 어릴 적 다니던 학원 근처에도 이 비슷한 것이 있었다.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은 그 골목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을 마치 폐가 탐험 정도로 생각하곤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게 남은 한 가지 인상은 그곳의 조명이 정육점의 그것과 같았다는 것, 그것은 내게 성매매와 관련한 특별한 시민 교육 없이도 커다란 불쾌감을 안겨주는 비유였다. 돼지고기와 다름 없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내가 성매매니 화대니 하는 이야기에 별 고민없이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월곡대교 아래의 골목에 대한 내 첫인상은 왠지 불그스르한 빛이 돈다는 것이었다. 검색해보니 이 곳은 '미아리 텍사스'라 불리는 곳인 듯하다. 바로 옆에 들어선 동일하이빌이라는 거대한 빌딩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이 골목에서 저 홀로 나부끼는 플랑에 적힌 '성매매 특별법 폐지하라'라는 문장을 본다. 이 역시 어쩌면 인류의 멍청한 버릇 하나일 지 모른다. 다만, 이 곳의 적막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목을 조르는 억압과 살갗을 벗겨내는 폭력의 정서인 듯하여, 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어쩌면 이 곳은 오히려 어수룩한 폭력의 현장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성매매 역시 그 형태를 바꿔나갔다. 채 형태를 변화하지 못한 채로 너저분한 폭력의 원형이 서울 도심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금 아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중,남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하였고 더욱이 군역까지 치르고 온 내가 성매매 문화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거짓말이다.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또 담배를 피면서, 하다 못해 카톡 방에서 그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내 학교 선배였고, 군대 후임이었고, 때론 동창 녀석이기도 했다. 사실 지나고 보니 나는 계속해서 그런 무리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열중했었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인권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시민교양은 갖추려는 이들이고, 나는 그나마 안락한 사람들 속에서 허약한 공동체를 살아감에 만족하고 있다. 다만, 오늘 내가 궁금했던 것은 내가 도망쳐 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수치심없이 말하고 웃으며 살아가는가? 나는 그들을 가엾게 여겼으나, 지금은 오히려 내게 그들을 가여워 할 자격이 있는가 묻는다.  

 퇴근하여 학교로 돌아왔어도 날은 무덥고,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다. 이 곳에서 나는 인권을 말하며 사람들에게 고민을 권유함에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고작 30분 남짓 떨어진 거리에 내 지난 침묵과 망설임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이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지극히 인종주의적인 상념들이 나를 스치고, 나는 나를 믿는다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나를 어떻게 믿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며 나는 더위때문만은 아닐 아찔함을 느꼈다. 언제나 삶에서 믿음을 배제하는 것 역시 항상 친구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내 버릇 하나다. 아무래도 오늘의 잡감을 이야기한다면 제법 꾸지람을 들을 것 같다. 내 훌륭한 친구들은 항상 나를 북돋아주는 원천이 되곤 했다. 지금의 내가 중요한 것이며, 지난 날 어떻게 살아왔고 침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할 지 모른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도 아주 가끔 이렇게 자기검열이 치열해지면, 그 말들에  끝없이 어깃장을 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남이라는 단어는 스스로를 그렇게 호명할 적에 조금 더 많은 고민을 수반하는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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