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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엉터리

근황(17.08.09)

친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최근 나눈 모든 대화가 '나이 들었다.'로 귀결된다고 했다. 나와 나눈 대화 역시 그랬다. 그는 적당한 연애가 끝나 적당히 씁쓸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연애의 규격화'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주변 친구들이 일상의 많은 부분이 규격화되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 여가생활은 물론이고 가치관이나 하다못해 낮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적당히 선을 긋고 적당히 머물러, 무질서한 일상을 최소한으로 만들어내며 매사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이전에 마주했던 강렬한 감정놀음은 돌아갈 수 없다만, 그럭저럭 뭐 괜찮은 편이다. 아쉬움은 순간의 서사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눈 우리 관계의 공간마저 그런 식으로 규격화되어 있는지 모른다. 나름 굳건히 몇 년을 지내왔으니, KS 마크라도 붙어있는지 모르지. 그런데 연애를 규격화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규격화하는 것이 산업 발전이나 소비자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잖아.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규격화하고 있는 것이지? 스물다섯이 되었다 하여 대마초를 태우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울렁대는 가슴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스스로를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학창 시절을 기억하지만, 이제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취직의 어려움’ 이라던가, ‘결혼은 현실’ 같은 문구를 적어서 눈앞에 대고 거칠게 흔들어 댔다. 목적의식이 일상을 잠식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점점 더 규격화된다.

일상을 규격화하지 않아도 나 역시 ‘나이 들었다.’고 느낀다. 어릴 적 등 돌린 친구 몇몇은 지금의 나를 보면 매우 비웃을 것도 같다. 누구는 돈 잘 버는 집안 같은 것으로 자신을 대표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누구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이들과는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들은 일찌감치 내가 이제야 깨닫는 것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구조의 문제였든 소시민적 삶의 방식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그들 행동 자체의 의미와 그 이면에 깔린 행동의 이유까지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언설에는 이전에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마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순응하고 체념하는 소극적인 삶의 양상은 문제의식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이라 해봐야 환멸, 냉소, 아마추어리즘 등등 패배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그것을 가정환경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달받았거나, 아니면 채 배우지 못해 뒤늦게 깨닫거나 할 뿐이다. 물론 나는 애석하게도 상당수를 몸으로 마음으로 체득하고 있다. 문제의식의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문제의식을 유지할 동력이 된다. 점점 동력을 잃어가는 모습이란, 일상의 규격화에 실패한 채로 다가오는 목적의식에 버둥대는 나이 듦인가 싶다.

아무 말이나 이렇게 뱉어대는데, 회의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예쁘기만 하잖아. 불씨도 꺼뜨리는 하얀 몽둥이, 누더기 입은 이 앉아있는 그루터기. 어중이 떠중이 나대는 상황이 눈덩이 같이 불어난 헛바람잡이. 반짝이 쓰고 좋아하는 망나니. 그 옆엔 덩달아 입이 귀에 걸친 엉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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