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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를 보고

근황(17.08.10)

영화가 남기는 '어떻게'라는 질문.


덩케르크는 위대한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위대한 감독이다. 동시대 영화 제작자들을 바보 취급하는 듯한 거대한 야망이 천재적이라는 수사가 부족하게 여겨지는 재능으로 스크린 위에 실현되었다. 감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경험의 수준에 이르게 하는 그의 연출은 기술과 자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과 자본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하며,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재평가할 수 있게 이끌었던 것은 전적으로 놀란의 재능이다. 서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연합군이 철수한다.’는 실화를 최소한의 각색만 거친 채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능은 그야 말로 압도적이다. 더할 것이 없는 영화보다 뺄 것이 없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뺄 것이 없는 영화다.


감독이 무엇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극장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관객들에게나 주어지면 될 일이지. 극장을 나서는 이들에게 필요한 질문은 아니다.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감독만 간직하면 될 일이다. 영화 이면에 숨겨진 의미 탐색에 몰두하는 것은 쓸모없다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됐건 영화는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문제의식이란 ‘어떻게’ 와 맞닿아 있을 것 같다. 덩케르크가 다루는 탈출과 생존이라는 실존과  전쟁이라는 비극,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지점은 분명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문스톤 호엔 처칠의 연설이 탑승할 수 없다.


덩케르크 속 전쟁은 ‘죽이려는 자 – 살려는 자’ 의 도식에서 조금 엇나가 있다. 영화 내내 독일군 인물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다. 총성과 쓰러지는 군인들, 폭격기의 폭격과 유보트의 어뢰, 전투기의 사격 정도만이 독일군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뿐이다. ‘죽이려는 자’의 모습이나 언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관객은 감정이입에 있어 탈출과 생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영화는 그를 적절히 밀고 당기는 한스 짐머의 지휘 아래, 개개인의 사투에 몰입하게 한다. 육군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그들을 구출하려 출항하는 민간 선박들, 포로가 될 것을 알면서도 슈투카를 저지하는 공군 장교까지. 특히 시간마저 흩트렸다 뭉치기를 반복한 끝에 영화 내내 계속되는 긴장과 에너지를 현재에 응축시켜 폭발시키는 연출력은 놀란이 아니고선 시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가 그에게 가져다준 것이 흥행만은 아니었던 것인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처칠의 연설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 가치를 재평가받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조국이니 투쟁이니 하는 것들은, 처연한 병사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며 급격하게 왜소해진다. 문스톤 호엔 그런 연설이 탑승할 자리는 없다. 조국이니 투쟁이니 하는 낱말들은 실존하는 개인들보다 우선할 수 없다. 놀란은 이 영화를 끝맺으며 덩케르크 작전에 함께한 모든 분들께 영화를 바친다고 했다. 그는 결코 연합군의 승리나 나치즘의 종말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몸부림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극히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사소함이야말로 핵심이 세상의 틀에 부딪혀 비집고 나온 부분일 테다.





하지만 야망과 재능 이전에.


덩케르크 원본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The event that shaped our world’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처칠이니 히틀러니 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놀란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이 문구가 산업화를 박정희의 치적으로 돌리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로 바뀌어 전달되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home’을 조국으로 번역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놀란이 봤다면 어처구니가 없어, 당장 스핏파이어(영화 속 영국군의 신형 전투기)를 몰고 인천항공에 도달할 일이지만 근래 한국 영화계가 보여주는 천박한 방식 - 대중의 삶을 조명하기는커녕 국가를 미화하는 등 - 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물론 국가적 상징의 미화 말고도 한국 사회가 개개인의 실존에 대해 점점 더 무례한 사회가 되고있다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놀란의 연출력을 논하기 전에 개개인을 존중하며 비극과 고통을 조명하는 기본부터 필요한 것이 한국 사회인 것이다.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범죄’에 경종을 울리겠다며,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은 사건을 소비하는 감독마저 등장하였다. ‘세월호’를 다루겠다는 작품이나, 그 레퍼런스를 차용하는 다른 작품들 역시 저열하기는 마찬가지다. 야망과 재능에 온전히 감탄하기에도 벅찬 영화 앞에 이 사회의 문화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린 무례한 감독들과 조국 타령하는 경영자들이라는 점은 꽤나 개탄스럽다. 하지만 덩케르크를 보며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을 수많은 감독과 예비 감독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방향성이 언젠가는 위대한 영화로 탈바꿈하길 바란다. 처칠의 연설보다 33만배의 진심을 담아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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