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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17.08.19

올해는 참 일이 많기도 하다. 일이라는 것이 건초더미를 치우는 내 사병 시절의 작업만 같았으면 좋겠다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올해 맡아서 하는 일은 체력에 정신력에, 감정까지 전부 소모시킨다. 15개에 불과한 학생회관 계단을 걸어내려가다보면 내가 너덜너덜한 종이짝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과분하다. 과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에 들고, 다음 날이면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계단을 오른다. 뭐 학생회관에서 살아가는 대다수가 그렇겠지만.

인권연대국장이라는 과분한 이름의 직책을 덜렁거리며 달고 다니다보니, 가끔씩 이상한 중압감에 시달리곤 했다. 임기를 시작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인권'연대국장이나 인권'연대'국장이 아니라 인권연대'국장'이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각종 실무를 맡아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내 의견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제법 단단해졌고,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의 경외심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그 자리에 환멸이나 아쉬움, 그리고 자기 검열을 한 움큼 집어넣었다.

자기 검열은 무엇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무슨 정의의 화신이나 그런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작년쯤에야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 탐구를 시작했었고, 그것도 보부아르부터 시작했다. 내게 페미니즘은 감수성의 영역이 아니다. 가끔씩 위로나 위안을 기대하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자기검열하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질색한다.

그러한 자기검열이 극심해지는 순간은 당연히 사건 처리 과정 속이다. 가끔씩 이런 저런 사건처리 과정 속에서 '나는 깨끗한 사람인가?'하고 되묻는 순간이 있다. 나 역시 어느 상황 어느 공간 속에서 가해자였을 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나는 잘 몰랐다고는 하나 가해자였다. 그런 내 과거와 결별했다고 하여 나는 지금 이런 일을 맡고 있을 자격이 있는가? 물론, 전제부터 틀린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감각은 빠르고 맥락은 느리다. 적어도 나는 내 방향성을 믿고 싶다. 내가 조금이나마 더 배우려 했고 바뀌려 했던 그 방향성 말이다.

아무튼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재단해야 할 때도 있으며, 때때로 더 나아가 그를 단죄해야 한다고 말하고 글을 쓰는 역할을 맡고 있다. 얼마 전 가장 소중한 친구 하나가 '맘충'에 대한 글을 적으며 단죄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고 썼다. 나는 그가 그 문장이 그의 의도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게 썼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것은 차라리 혐오는 쉽고 공감은 어렵다가 맞을 것 같다. 그런데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말을 한참 생각해보았다.

사실 단죄가 더 어려워야 맞다. 단죄보다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종종 마주하듯, 피해자와 그 주변인끼리의 단죄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잘 모르는 가해자들을 끊임없이 가르치며 발전해왔다는 그 말이 맞다면,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마이너스로 유지되는 허약한 공동체가 아니라 재발할 위험 자체를 낮추는 건강한 공동체라면, 가해자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이해가 이뤄진 후에 단죄도 이뤄져야 한다.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단죄는 형식이고 이해가 그 내용이겠다만, 단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죄는 이해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나는 전두환이 자연사를 앞두고 있음에, 이뤄지지 못한 단죄가 어떤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느낀다. 누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그 분이 바라본 가치관에 나는 아직 가닿지 못했다. 집행은 집행이다. 지나가다 벽돌 맞는 것 아니냐는 농반진반의 말마저 듣고 있는 요즘이라지만, 신발끈을 더욱 꽉 묶어야 한다.

하이고 밤을 새면 말이 많아진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어릴 적 하던 잠투정 그대로라 하실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 감각은 빠르고 맥락은 느립니다. 단정은 쉽고 이해는 어렵구요. 생각이 가는 대로 말을 늘어놓다 보니 해가 다 밝았다. 할머니 생신이라 수원에 내려간다. 케이크는 내가 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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