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7.09.07)
나는 종종 페미니스트라는 오해를 산다. 페미니즘이 가닿지 않은 나의 취향과 일상의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나는 고종석씨가 엠마 왓슨에게 편지를 쓴 이후에도 그의 몇몇 문장을 외우고 다닌다. 가끔이지만 스윙스의 음악을 듣기도 하며, 아수라나 신세계 같은 소위 알탕 영화를 좋아하기도 한다. 이런 내 취향과 일상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지인들이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확신이 서지 않으므로 그들의 판단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할 수 없지만, 칭찬이라 생각하고 즐거워 한다. 그런 예외적인 지인들을 제외한다면 나는 제법 오해를 사고 있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조금 억울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는 것뿐이며, 실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페미니스트라 선언하기엔 조금 부족하다고 느낀다. 물론 그것은 내게 부재한 당사자성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나와 같이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들 모두가 나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스트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누가 누구에게 그 기준을 강요한단 말인가? 그저 나는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위해 대략적으로 세 가지 조건을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으며, 아직 내 자신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위해 내가 스스로에게 되묻는 세 가지 조건은 지적 탐구와 자기 윤리 확립, 그를 통한 일상에서의 실천이다. 내 지적 탐구는 사실 한참 모자란 편이고, 자기 윤리에 있어서도 아직은 구멍이 많다. 그러한 윤리를 갖고 살아가는 일상은 또 어떻겠는가. 내겐 아직 많은 것들의 미지의 영역이고, 여전히 많은 지적을 받으며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낙태의 비범죄화를 찬성하고, 예술에서 여성을 다루는 어떤 방식들을 규탄하며, 돌봄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사람이지만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의견을 개진하는 주체로서 나는 각각의 의제에 입장이 있는 사람일뿐, 굳이 내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라 부를 이유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차라리 나는 계절에 따른 간헐적인 우울함, 숨쉬듯 곁에 머무는 비관주의 같은 것들이 내 정체성에 가깝다고 느낀다. 정체화는 미진하나 내가 가진 페미니즘 한 조각은 자기검열의 성격을 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처음 접하던 시절부터 페미니즘이 감수성의 영역이라는 언설은 내게 막연한 회의감으로 다가왔다. 페미니즘과 함께 보낸 지난 시간은 어떻게 보면 그 회의감을 단단하게 만들어간 시간이었다. 동시에 나는 페미니즘을 설파하는 과정이 단순 공감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설득과 토론, 교육의 과정이라고 믿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런 반복을 통해 시민 윤리의 영역으로 페미니즘의 어떤 부분들은 포섭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나의 어떤 감수성 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별로 언급하는 편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감수성이 애초부터 부재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아마 그것은 시혜적이고 선택적으로 작용했으며 미약한 범위에 그쳤겠지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함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그러한 감수성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다. 그 차이는 남들 보기에 별 것 아닌지 모르나, 개인의 일상에 있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여름에 강남역 11번 출구에 막연히 서서 생각에 잠겼던 날은 어떤 여름엔 28680원짜리 페미니즘적 비평 기사를 쓰는 날로 바뀌게 되었다. 여전히 성북천을 뛰는 와중에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삶이 지겹다는 인식을 조금식 떨쳐내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공대 남자 복학생(그들은 어떤 이들에게 학내 안티 페미니즘의 총본산인지 모른다)으로 불리는 주변 친구들 역시 나의 증폭된 감수성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요즘에 들어서 근본적인 변화라고는 이야기하지 못하겠으나 공존을 위한 문법을 정비하고 있다.
가을이랍시고 북콘서트를 준비하게 되었고, 질문 사항이나 뽑아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다. 어느 새벽에 책을 덮고 무언가 명징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어 글을 끄적였으나, 사실 또 쓰고 나니 휘발성 짙은 여운이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매번 페미니스트냐는 물음에 "잘 모릅니다." 웃고 넘어갔으나, 책을 읽어내리며 한 번쯤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써볼 필요를 느낀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의 페미니즘은 소수자성의 부재에 따른 자기검열과 주류를 배반하는 감수성 사이 어딘가에 걸쳐있다. 그 둘은 서로 협력과 견제를 반복하며 나의 게으름을 꾸짖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취방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중이다. 그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나는 제법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것은 누구에게 내보이기 위함이 아닌지라, 굳이 외출하지 않을 뿐이다. 아마 영영 외출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는 여기서 기꺼운 마음으로 손님 맞이를 반복할 것이다. 나를 찾는 손님들은 대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소개한다. 나는 그 지극히 사적인 공간과 관계속에서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자신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