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 유년기의 영웅, VJ the King of Flow

내게 가장 좋아하는힙합 음악을 꼽으라면 이센스의 <비행>이나 P-type의 <광화문>을꼽겠지만,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래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버벌진트일 수밖에 없다. 중학교 3학년 소풍지였던 에버랜드로 각자 모이던 날, 나는 버스를 잘못 탔다는 사실도 잊고 2시간짜리 여정에서 버벌진트의누명을 들었다. 아직도 흐릿하게 “왜 모를까 내 랩은 초월임을.”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버벌진트의 목소리가 기억나는 것 같다. 그때이후로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신랄함에 대한 욕망, 완벽함에 대한 동경, 체념하는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나더러 버벌진트 kid라 해도 좋다. 하다못해 그의 음주운전 전과 역시 내게는 큰 경각심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전부터 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좌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그의 정규 앨범인 [Go Hard]를 듣던 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고,최근 발표된 <자기암시>를 듣다 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어조금 기록해보려 한다.


2001년 발표된 [Modern rhymes]와 함께 힙합씬의 가장뜨거운 인물 중 하나가 된 버벌진트는 Diss의 아이콘이자, 투쟁과불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Show & Prove와함께 한국어 라임론을 정립하며, 그의 기준에 미달하는 MC들에게신랄하디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에게 열광하는 팬덤은 날로 늘어났지만, 동시에 수많은 Hater 역시 거느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디스만 하는 래퍼는 아니었다. 다양한 주제들에 다양한방식으로 라이밍을 해왔다. 그럼에도 언제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기에 그랬을까? 그가 [Favorite EP]와[무명]에서 보여준 다양한 스펙트럼은 그의 공격적인 라이밍에 매몰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디스는 또 다른 디스를 부르고, 독기로 가득 차오른버벌진트가 은퇴를 결심하며 내놓은 앨범이 바로 [누명]이다.


[누명]은 버벌진트의 커리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앨범이자, 한국 힙합의 흐름 속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앨범이다. 강한공격성과 조롱, 신랄함은 물론 환멸마저 담고 있지만, 이앨범은 패퇴한 자를 위한 레퀴엠이라기보다는,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승리 선언에 가깝다. 물론 [누명] 역시도그가 다루고 있는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사랑과 가난, 착취에대한 스토리 텔링 역시 [누명]은 다루고 있다. 후에 그가 관심을 갖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연예계의 성 착취등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쨋거나 [누명]은 전반적으로 날 선 라이밍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극히 공격적인 앨범으로평가받는다. 그는 이 앨범 전체에 걸쳐 예수를 호출하며, 자신의은퇴를 예수의 죽음에 은유한다. 이러한 은유는 그의 자신감과 완벽주의를 동시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본시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가 자신의 죄 없음을 확신했듯, 버벌진트역시 [누명]을 통한 자신의 성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은유기 때문이다. 버벌진트가 [누명]으로 종결지은 것은 자신을 둘러싼 “진보니 퇴보니”하는 논쟁만이 아니다. 그는 [누명]을 통해 모든 공격성을 쏟아냈다는 듯, 다음 앨범 [The Good Die Young]을 통해 다른 MC들과의 관계속 버벌진트가 아닌 그저 자신의 내면과 역사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언더그라운드 래퍼로서 버벌진트의마지막 모습이었다. [Go Easy]와 [10년동안의오독I]에서 각각 <좋아보여>와 <충분히예뻐>를 히트시킨 버벌진트는 단순 래퍼로서만이 아닌프로듀서로도 거듭나는 등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동안 한국 힙합의 모습도 변하게 되었다. 버벌진트가 부르짖던 스킬에 있어서 MC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훌륭한기량을 뽐내게 되었다. 하지만 <쇼미더머니> 등 힙합의 대중화로 인해 힙합 역시 트렌드에 의해 획일화되고, 랩문학의주제가 지니는 스펙트럼 역시 지나치게 오그라들었다. 그런 시점에 등장한 앨범이 바로 [Go Hard]다.


제목이 일찌감치공개되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Go Easy]를 언급하며버벌진트가 [누명] 시절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Go Hard]는 그러한 기대 역시 철저하게 비웃어버리며시작한다. 오히려 특유의 신랄함으로 그러한 기대를 깨뜨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랄함을 기대했던 이들을완벽하게 만족시킨다. 동시에 [Go Easy] 역시 본인을대변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대칭적 앨범의 구성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읊는다. 그 축이 되는 트랙이 ‘나대나’라고할 수 있겠다. 훅도 멜로디도 없이 두 개의 벌스로 끝나는 이 곡은 버벌진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라할 수 있겠다.


첫 번째 벌스속 버벌진트는 냉정하게 그 자신이 놓인 현실을 진단한다. 그리고 제언한다. “역사가 말해, 진심보다는 눈치로 살아간 자들의 이름이 더 길게남는다고. 추억으로 간직해, 네 첫 EP 때 했던 각오.” 하지만 두번째 벌스 속 버벌진트는 자신의 내면의목소리를 거부하며 의지를 다진다.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 좆같은 건 좆같다. 말하지 못하면 후에 후회하게 될 것 같아. 그게제겐 더 패배로 느껴질 것 같아, 지금 얘긴 공감이 안 갑니다, 그닥잘.” 힙합 엘리트에서 가장 성공한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그리고다시 성공한 뮤지션으로 항상 진일보했던 그는 여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를 좌절케 하는 어떤 것들앞에서도 그가 지켜온 태도를 잃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물론 이 선언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는 뚜렷한 실패와 마주한 적이 없었으며, 굽혀본 적 없는 이가불굴의 의지를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입자’와 ‘건물주’, ‘보통사람’과 ‘희귀종’ 사이를 ‘Rewind’했다 ‘Fast Forward’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한결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태도는 처음 가사를 쓰던 버벌진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도하다.  


앞서 언급한 ‘세입자’와 ‘건물주’, ‘보통사람’과 ‘희귀종’, ‘Rewind’와 ‘Fast Forward’는 모두 [Go Hard]의 트랙 제목들이다. 그는 자신의 생성 속에서 자신의존재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둘 모두의 미학을 맛깔스럽게 살려내며, 그의음악을 전개해왔다. 그래서 [Go Hard]의 부제인 양가치는단순 과거와 미래라거나, [누명] 이전과 이후를 다루는 것이아니다. 조금만 철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버벌진트라는 존재자의 존재와 생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누명]의<Losing my love>를 떠올리게 하는<Fear>라든가, <The Grind>의 후속 격인 <The Grind 2>는 [누명] 시절로의 복귀가 아닌 [누명]부터 [Go Hard]까지 일관된 그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 명의 팬으로서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음주운전 사건을 바라보며 안타까웠고, 실망스러웠다. 다만, 그가 이전에 발표한 믹스테입의 트랙 중 음주운전 후 뺑소니사고를 일으키는 픽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팬으로서 그의 말마따나 ‘올 게 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는 반성 곡을 발표하긴 했으나, 대중들의 시큰둥한 반응은 물론이고 팬들에게도 용서를 구하는 것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최근 버벌진트는 싱글 <자기암시>를 발표했다. 벌스의 빼어난 완성도와는 별개로 가사의 내용 또한의미심장하다. [누명] 시절만 해도 “내게 있어 승리라는 건 거울 앞에 섰을 때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자신을 맞이하는 것”하고 내뱉던 그가 “이런 가사 이런 mood 밖에 뱉지 못해 미안해. 거울 앞에 서면 생각나는 게 이런거거든. Yeah, I`m going through the days of suffering”하는 모습을보인다. 그는 이 계절을 어떻게 지나고 있을까. 이 계절이가고 다음 계절이 다가오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가 여전히 음악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게 대화를걸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의 다음 발걸음을 지켜볼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