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7.10.14)
폭력이 서로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네가 살아가는 이 곳에 폭력은 언제나 실재한다. 부피를 가진 인간이 위치는 있되 크기는 없는 점과 같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이 이야기는 물리의 층위만은 아니다. 서로 살아온 길이 다르고, 뱉는 문장이 다르고, 그래서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생각의 영역에서도 폭력적일 수 있다. 다만 접점 없는 서로 다른 생각들은 서로 마주하기 전까지 휴전하고 있을 뿐이다. 비슷한 구호를 찾은 사람들이 뭉치면 그것을 조직이라 부르고, 정반대의 구호를 찾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면 그것을 투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보통 이 모든 과정을 정치라고 부르는 것도 같다.
물론 정치 혹은 계급담론이 사라진 학생사회에서는 당사자성에 기반한 가해와 피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조직도 투쟁도 원활하지 않으나, 당사자성이나 고통 그 자체에 연대하는 경우는 더러 생긴다. 물론 그것들을 포괄하는 가치 아래 묶여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는 싶다. 어쨋거나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그것은 모든 학생사회가 주목하는 무엇이 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공론장에 올라오지 못한 좆같은 기억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그냥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기도 한다. 그래도 반성폭력에 대해 많은 열정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이 학생사회의 중심부에 계시고, 나름대로 미약하나마 사무를 보는 나같은 사람도 국장입네 했던 것이 지난 1년이라고 해야할까.
반성폭력의 흐름에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은 더 이상 단순한 무례함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규범을 훼손하는 여러 형태의 범죄로 지목되었다. 미처 범죄로까지 지목되지는 못했으나, 명백하게 개인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언행들도 있다. 이 역시 광의의 성폭력이라는 낱말과 함께, 가해와 피해의 개념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불쾌감이 피해로 명명되는 것, 무례함이 가해로 명명되는 것. 둘 다 각각의 의미를 지니며, 지난 세대의 치열한 고민과 투쟁의 결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요즘은 끝없이 이질감과 위화감이 반복되는 나날이기에, 친구의 전화를 받고 생각에 잠겼더랬다.
친구가 집에 돌아가는 길의 일이다. 지하철에서 한 할아버지가 자꾸 앞 쪽에 있는 여성을 향해 철푸덕 철푸덕 넘어졌다고 했다. 한 두번도 아니고 짧은 시간동안 반복적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했다. 지하철에 타고 있던 모든 여성들의 눈총을 받던 할아버지는 한 정류장만에 내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내 경험에 비춰보며 씁쓸해 했는데, 대개 그런 취객들이 내게 몹쓸 짓을 시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남성이기도 하거니와, 키는 175cm에 몸무게는 85kg에 조금 못 미치는 체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 여성이 느꼈을 불쾌감에 천착하고 있다. 남성을 제지하고 그와 여성을 분리하는 것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성의 불쾌감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이어졌고, 대개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들이 향하는 곳은 짜증 섞인 한숨이다. 나는 일순간 무력해졌다. 생각을 정리하고 전개하겠다며 글을 써보마 했다. 친구는 통화를 끊는 것이 살짝 아쉬운 듯 했으나, 그러라고 했다. 내 친구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없다하여, 그래서 내가 그의 말에 적극 동의하지 않는다하여, 사려깊은 이 친구가 내게 실망하지는 않겠다. 허나 잘 보이고픈 이에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은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이건 내 한심한 버릇 하나다. 그래도 무작정 치는 맞장구는 내가 그와 맺는 관계의 문법이 아니다.
불쾌감이 개인에게 영향을 가하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으나, 누군가는 분개하여 불쾌감을 준 상대를 응징하려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누군가는 종종 극단적인 피해의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한다. 가끔 자신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의지로, 피해자에서 저항주체로 변화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결코 많은 수는 아니다. 오히려 정작 이야기해야 할 지점은 왜 저항주체들이 충분히 등장하지 못하냐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에 대해 교육과 절차의 부재라기보다는, 뿌리깊은 정치와 구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실 어쩌면 나는 그 정치적 해결에만 매몰되어 있는지 모른다. 인연국장이고 개나발이고 이제는 조금 더 주변 사람들의 마음 곁에 있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는 떠납니다 후후. 나는 정치 못하겠으니 나는 진짜 떠납니다.
아니 아직은 떠나지 못했지. 물론 나는 친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불쾌했던 감각을 피해로 명명하는 과정을 응원하고 있다. 역시 무력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만, 내가 친구더러, "불쾌감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해보렴."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내 마음 한 자리에서는 불쾌감을 피해로 명명하는 것의 연장선을 그리고 말았다. 불쾌했던 감각을 피해로 명명하는 것은, 자신의 피해가 일종의 사회적 구성물임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지하철에서 치근덕대는 취객의 경우에선 사회 속 젠더의 위계, 사회 잔존하는 성차별적 고정관념 등등을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억압하는 그 기제를 비웃고 조롱하며,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사회를 고쳐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말았다. 그 정확히 이 지점이 내가 다른 몇몇 이들에게 "배부른 소리" 같은 말부터, "당신도 한남이니깐."과 같은 말들을 듣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불쾌감, 공동체가 그것을 피해로 명명한 후에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는 "무례함, 공동체가 그것을 가해로 명명한 후에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공동체니 뭐니 다 필요없는 대중 학우로 돌아가기까지 3주쯤 남은 시점에서, 친구 곁에 얼마나 가까이 서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겠냐. 나는 배 나온 한국 남성인데.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이제는 그런 말들을 아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나와 그들간의 간격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체념도 아니다. 동지적 관계를 구분짓는 일종의 커트라인 쯤으로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오늘 나의 회피는 이렇게 다시 고발됨이 마땅하다. 뜻 모를 말은 뱉을 수 있어도, 책임지지 못할 말은 뱉기가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