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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근황(17.10.27)

얼마전까지만 해도 “부분은 전체 속에서 규정된다.” 라는 문장에 꽂혔더랬다. 그래서 내게 관계는 상대를 내 속에서 규정하기 위한 무엇이었고, 상대가 규정되지 않는 순간들에 의아함을 갖고 있었다. 초코머핀의 초콜릿 같은 당신. 아, 그런데 초콜릿이 없어도 초코 머핀이라 할 수 있나. 빵 위에 소복히 내려앉은 초콜릿을 걷어내면 나는 여전히 초코 머핀일까. 아니지 아니지 빵 안에도 녹은 초콜릿이 있는데, 그걸 다 파내면 되는걸까. 그 때의 나는 초코 머핀일까.

오늘 불현듯 담배를 태우며 눈을 마주치곤, 담배 연기 사이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그는 나의 어떤 부분인가. 팔인가 다리인가, 전두엽인가. 가로등은 광원이 되어주었고, 그에게 튕겨져 나온 빛무리가 내게 다시 되돌아왔다. 그 순간 그를 이루는 잡다한 감각이 내게 쏟아졌고, 나는 미처 마주하지 못하는 그의 다른 영역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가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인식되자, 나는 그와 나를 둘러싼 공기를 분리할 겨를없이 세계 속에 그 뭉텅이를 ‘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세상이라는 전체 속에서 아름다운 것, 예쁜 것은 ‘우리’였고, 나는 초코머핀에서 초콜릿을 긁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속에서 뭔가 미지근한 무언가로 함께 한다는 것은 언제고 기쁜 일이다. 서로의 지평은 더욱 넓어지나, 서로 디딘 자리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삶은 그런 식으로 이 정도면 제법 괜찮지 않냐며 너스레를 떤다. 동시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규정된 무엇이라는 것,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규정하는 방식을 항상 염두에 두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싸울 상대가 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매몰될세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른하게 한 발자국씩 삶을 옮기는 새벽, 광폭하게 삶을 휘갈기는 새벽. 언제고 눈물은 터질 것 같은데, 문장이 터지지 않는 요즘에 이렇듯 새벽이 반가운 것이 얼마만인지. 제어공학 시험이 남아, 눈을 붙일 수는 없겠지만 이미 잠에 반쯤 들어선 것도 같다. 그래도 처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달콤한 꿈을 꿀 준비가 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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