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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퇴임사

도무지 할 말이 없는 나날이라, 무슨 문장을 쓰는 것도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이젠 더욱 또렷이 가진 한계와 빈곤에 대해 인식하고 있으나, 인식된 그것들 역시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또 한 움큼이다. 최근 몇 가지 잡감이 떠오르는 일들이 있었으나, 문장을 아낀 채로 소중한 사람 몇몇에게만 말을 우물거렸던 것이 그런 맥락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또 끄적이는 이유는 일종의 강박관념 혹은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더 이상 학생회 언저리를 배회할 일은 없을 듯하니, 괜스레 사로잡히는 후련함과 후회 등등의 감정 말이다. 쨍하고 차가운 날씨에 손에 담은 온기가 미처 손가락까지 퍼지지는 못했으나, 무엇인가 끝맺음에 있어 조금 뻣뻣한 문장을 적어도 될 것 같아 적어본다. 자기 객관화가 얼마나 가능할 지는 모르겠으나, 글을 다 적고 난 후에는 눈 앞에 닥친 문제들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해볼 수 있길 바란다.

24살 한 해를 돌아보련다. 생각해보면 멋드러진 문장은 많고 얄팍한 감투쓰고 꿈꿔대는 또다른 감투 혹은 절실한 소망. 그 안에서 씹고 볶고 잘났다고 허상에 지핀 불을 꺼보면 사기꾼과 개새끼들이 판을 친다. 그게 알려지지 않은 이름만 번드르르한 공동체 속 잘난 사람들의 야사(野史)라서, 그 개짖는 소리에 몽둥이를 들었다가도 자기 검열과 함께 내려놓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시대 속에 묻혀진 고만고만한 놈들이 자신은 다르다며 무엇무엇의 후계자를 자처하거나 선지자 행세를 하고 있었고, 팽개쳐진 업무 속에서 진짜 땀흘리는 사람들은 묵묵히 할 일만 하곤 했기에 어느 회의록에 이름 한 줄 남기는 것 외에는 그들의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눈가에 고인 악어의 눈물보다 빠르게 휘발하는 가치관들, 시대정신에 이름 한 줄 올려보겠다는 녀석들의 악다구니. 그래도 시든 지 오랜 꽃에도 향기가 남았다고 믿는 대화, 웃음, 결의 같은 것들.

이렇듯 양가적인 감정들이 서로 앞다퉈 쏟아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지난 1년을 규정하기엔 아직 그 치열함이 몸에서 빠지지 않은 것 같다. 학생회를 통해 여러가지 방면에서 식견을 쌓을 수 있었고 개인적인 성장 역시 어느 정도 이뤄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양태는 하늘같이 보이던 사람들의 높이가 이제는 태산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하늘 아래 대륙지각이야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을 것이며, 나름대로 방향도 잡히고 있다. 다만, 업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이 늘었다. 취직을 못하면 이상한 학부에서 수업을 듣다보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다. 교양과 지성에 대한 열망은 아마 평생 간직할 무엇이 아닌가 싶은데, 그것을 굳이 업으로 삼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로 보인다. 언제부턴가 인생에 필요한 것은 술, 담배 아까워 하지 않을 경제력과 소중한 사람과 나누는 대화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긴 내년이면 끽해야 25이다. 평생을 어찌 논하나.  

눈 앞에 닥친 것은 졸업이다. 남은 학점을 계산해보니, 빡세게 학교를 다닌다면 2학기, 널널하게 다녀도 3학기면 졸업을 할 것 같다. 지난 학기 휴학했던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아 다행이다만 취직하는 동기들 소식에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래도 도전해보고픈 직업이 있어 아무래도 내년은 정말이지 고달픈 한 해가 될 것 같다. 국어니 영어니 하는 시험들과 독서와 신문 읽기, 작문 역시 게을리 할 수는 없겠다. 힘이 닿는다면 인턴도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대학원 석사과정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전공에 대한 흥미가 아무래도 적은 탓에 그런 생각은 조금 치워두었다. 군대와 학생회가 남긴 것이 있다면, 어딜 가서든 밥벌이는 할 수 있겠다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사랑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사랑은 소득의 지배를 받는다던데, 저 모든 계급의 전복을 꿈꾸고 만다. 볼리비아에서 죽었던 아르헨티나 의사의 말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삶 속에서 사랑을 찾아, 그것으로 하여금 일상과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다시 가을이고, 짧다면 짧은 학생사회 이야기가 끝났다. 오늘은 수업 시작 15분 전에 강의실에서 머쓱하니 앉아있었다. 신발이 헐렁하지 않아도 신발끈을 꽉 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절의 이름이 착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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