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낡은 것.

근황(17.09.02)

by 취생몽사

성냥을 몇 갑 선물받은 적이 있었다. 어느 저자와의 대화 뒷풀이였는데, 중국에서 성냥공장을 한다는 아재가 있어 성냥을 풀어놓았다. 내 스승은 스스럼없이 성냥을 받아 몇 갑 쥐어주었다. 나는 지포라이터에 기름 넣어 담배를 태우는 주제에, 성냥을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이라도 되는 양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담배를 태우기 위해 성냥을 켜보니, 사반세기 동안 케잌초 향이라고 생각했던 그 냄새가 성냥 타는 냄새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냥이 있던 손아귀에 플라스틱 라이터가 들어서며 나같은 흡연자가 굳이 그 냄새를 기억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위협하듯 치익거리는 발화에 긴장할 필요도 없고, 바람불면 꺼질까 안절부절할 필요도 없다. 플라스틱 라이터 똑딱 한 번이면 4분의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도 왠지 붉은 인이 타는 냄새에 흐뭇해지는 건 내가 낡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낡은 것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성북천과 보문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허름한 가게들을 아침마다 보러 가는 것이 그런 이유다.

안암 자취방에 살게 된지도 2년이 되어간다. 기숙사에 살 때와는 또 다르다. 아 물론 기숙사는 신축되어야 하지. 그래도 자취방에서 이 공간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동네야 말로 피타입이 이야기한 도시의 모서리에 정확히 들어맞는 풍경이다. 이 어딘가에 분명 젊은 악사의 기타 소리를 따라 비를 피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 곳곳에 붙은 재건축 반대 플랑과 무심하게 흘러가는 성북천 사이에서 나는 너무나 부족한 인간이다. 끊임없이 공간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안에서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물가의 반들반들한 바위와 그 밑에 깔린 이끼같은 것들. 그래야만 나는 낡은 것들을 낡은 것들로 여기지 않고서도, 낡은 것들을 낡은 것들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낡은 것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색은 저마다 다르되 향은 사라진 라이터 대신, 하나같이 붉그스름하되 들큼한 향이 나는 성냥을 쥐고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보아야할까. 똑같은 선을 그려도 서로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성냥만 붙들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가정폭력과 아동착취에 내몰린 성냥팔이소녀가 태웠던 성냥은 백린이었다 들었다. 백린이 만들어낸 환각이 덮어둔 구조의 민낯은 냉혹하고 어두웠을 것이다. 그걸 끄집어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남몰래 그 구조 속 내 자리도 찾아가야 하겠지.

지난 겨울과 봄에 걸쳐, 나는 공존과 동지를 고민했었다. 그런데 또 여름엔 환멸이 끓어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파렴치와 반지성을 경계하며 맞이한 가을엔 나는 '너는 무엇을 대표하고 있느냐'고 자문하게 되었다. 또 왠지 모르게 그 질문의 답에서 깊고 수척한 행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깊고 수척한 행복을 찾으려 살아야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그래서 "거 봐라 삶은 점점 나아지지 않느냐"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계절에. 쥐구멍도 뙤양볕도 아닌 곳에, 멈춘 것들과 터져나오는 것들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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