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가이드 vol17. 기고
지난가을 노벨광장에서 열여섯 째 퀴어가이드를 받아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나 되었나 보다. 1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퀴어가이드엔 기고 요청을 받아 부족한 글을 적게 되었다. 아마 내가 이글을 적을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9개월 간 총학생회 인권연대국장이라는 과분한 이름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다니는 나 같은 한량보다도 애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열일곱 째 퀴어가이드를 위해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다.
어쨋거나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은 물론 기꺼운 일이나 부끄럽기도 하다. 임기를 시작하던 지난 12월과 마찬가지로, 여름이 문가에서 신발을 고쳐신는 때에 스스로의 자격을 되묻고 마는 것이다. 겸사겸사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니 양손에 추억이 한 움큼이고 후회가 또 한 움큼이다. 인연국에게는 꿈꾸었으나 좌절했던 일들도 있었고, 노력했지만 미진했던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후회를 끊어내고 추억을 돌아보는 과정속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조금씩 더 나아지는 법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글을 적으며 사람과사람 회원분들, 더 나아가 우리사회의 다른 성소수자분들과 함께 연대했던 시간들을 되짚어보았다.
성소수자 인권을 외치는 대자보들이 사람에 의해 훼손되었을세라 함께 총무부를 오가며 CCTV를 열람하던 날도 있었다. 분노와 허탈함이 교차하던 순간들. 비를 홀딱 맞긴 했지만, 한 손에 군인권센터 굿즈를 손에 쥐고 총학생회 깃발과 함께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던 날도 기억한다. 우리의 참여가 무례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흥겨웠던 순간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속에서, 인권연대국이 성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하는 기조는 단 한 문장이었다. 그것은 어느 햇살 좋은 날의 순간이다. 지난 오월의 둘째 날,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계단 앞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피켓과 플랑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씨는 TV 토론에서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내뱉었고, 많은 이들이 좌절했던 시절이었다. 고려대학교의 많은 이들 또한 좌절했지만, 그 중에서도 분노하되 환멸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남겨 둔 시점에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와 중앙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사람이 함께 하는 기자회견이었다. 그 날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고, 구호를 외쳤다. 총학생회장은 내가 건네준 연설문을 읽었고, 나 역시 속으로 적었던 문장을 되뇌어 보았다.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의 무지개는 하늘을 선택해 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임기가 7부 능선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퀴어가이드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으며, 당시의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는 소수자 혐오와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압제를 불살라라는 총학생회 현판은 과연 떳떳한가. 소수자 인권을 침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압제 하나는, 동료 시민들의 시선일테다. 우리 학생사회는 그 시선에서 자유로운가. 아마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고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문장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퀴어들 역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였다. 동시에 저 문장은 우리 모두를 위한 약속이었다. 언제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날에, 그 약속을 되짚어보며 삶은 더욱 나아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자는 약속 말이다. 약속의 하늘에서 그 무지개를 마주할 수 있다면 매 순간 우린 사랑을 질투하는 모든 것과 싸울 것이다.
무지개 핀 하늘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그 하늘을 상상하고 그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당장 우리가 그 무지개를 마주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심은 씨앗은 훗날 피어날 무지개 한 조각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열여덟 째, 열아홉 째 계속 될 퀴어가이드가 그럴 것이다. 무지갯빛 하늘이 머지않았다.
작성자: 인권연대국장 윤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