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12
첫번째 컷,
학원 강의를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또 도시락을 사먹었다. 편의점 기프티콘의 힘으로 이틀동안 편의점 도시락을 네 개쯤 먹었다. 내 처지를 동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나는 대부분의 술꾼들이 그렇듯 몹쓸 소비습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취하면 깨기 전까지 돈의 가치를 망각한단 뜻이다. 어쨋든 이 편의점 도시락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마자 질린다. 김훈이 아마 입에 인이 박힌다고 이야기했던, 그 감각이 내게도 있는지 모르겠다. 옆에선 한 아저씨가 배당률 어플을 보며 스포츠 토토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정배(배당은 낮지만, 승률이 높다고 예상되는 쪽)로 여러 경기를 마킹하고 계신 듯 했다. 어제 문득 애인에게 역배(배당은 높지만, 승률이 낮다)는 승리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근거는 없었다.
두번째 컷,
요즘 열심히 화나의 곡을 영업하고 있다. POWER라는 곡인데, 쇼미더머니 등으로 파이는 커졌지만 인디 정신이 말라 죽어 장르의 본질과는 멀어지고 있는 힙합씬을 그려낸다. 그 속에서 화나는 베테랑 반열에 올랐음에도 대중적인 영향력은 미미한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는 후배들의 뒤를 벗댈 힘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영혼을 팔 수도 없다. 그는 '하지만 꼭 어차피 한 쪽에 건다면 난 희망 쪽'으로 그의 의지를 수렴한다만, 상황을 낙관할 만큼 눈치없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그의 노래를 '반복해서 적어나갈 이 작고 너절한 비망록'이라고 중얼거리며, 간신히 현실의 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고개를 내민 이유는 적어도 이 곡에선 설명되지 않는다. 그 역시 근거는 없었다.
세번째 컷,
"난 너를 믿어."따위의 말이 가지는 로맨스적인 분위기를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언제고 사랑과 믿음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근거 없는 사랑이 근거 없는 증오로 종종 바뀐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집이 센 편이며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그를 잘 표현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해버리곤 한다. 그래서 믿음은 다르다. 근거 없음이야 말로 믿음의 근거다. 근거가 없어야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로가 악마임을 주장해야 하루를 버텨나갈 수 있는 근본주의자들의 도시에서, 그것은 내게 종종 가장 혐오스러운 무엇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는 말만큼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말이 또 있을까. 사람은 사랑해야 할 뿐, 믿을 것이 못된다.
마지막 컷,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들에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다. 결국 나는 역배는 승리한다는 언더독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언더독은 루저의 동의어가 아니다. 언더독은 패배가 뻔한 경기장에 고개를 쳐들고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노르웨이 리지백이 기다리는 퀴디치 경기장으로 들어갈 적에 지팡이를 꽉 쥔 채로 고개를 쳐들고 나아가는 해리포터가 언더독이다. 근 10년간 밟아본 적 없는 4강 무대를 향해 리그 1위 팀과 맞붙는 리버풀이 언더독이다. 잔인한 4월이 여전히 분노를 머금고 네번째로 돌아왔음에도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언더독이다. 언더독의 승리는 '기적'이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그렇듯 결코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줌 되지 않을 그 결실이 다가올 전투의 근거는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나, 언더독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붙잡을 한 가닥 희망쯤은 된다. 이 역시 근거는 없다. 그래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