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섬유유연제
어제는 간만에 '식당에 자리가 없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보았다. 사람 없는 대학가라는 안암의 몇 안 되는 장점이 빠르게 퇴색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달력은 무심하고 잔인하게 발걸음을 옮겼고, 어느새 3번째 달이다. 잠시 한 눈을 팔았더니 개강이 엎질러져 버렸다. 그 때문인가, 세탁기에 섬유유연제를 너무 많이 넣은 것도 같다.
개강과 동시에 다시 만나야 할 반갑지 않은 얼굴들을 떠올리다가, 다시 보지 못할 그리운 얼굴들까지 떠올리고 나니 기분이 심란하다. 엎질러진 개강 덕분에, 정성스레 적어둔 설렘의 글씨는 흉하게 번져버렸다. 학사 일정과 대한민국 헌법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행복'이란 단어가 딱 두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전문과 제10조, 1학기의 종강과 2학기의 종강이 그렇다. 우울함이 자취방을 채우다 못해 창틈으로 새어나가는 것만 같다. 우울함은 생각없이 사는 나같은 놈에게 가장 좋은 고민의 연료이지만, 오늘은 그 기름냄새가 싫었다. 내일은 성북천을 뛴다. 반드시. 2주 넘게 다짐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해봐도 힘이 나지를 않는구나. 이 자취방에는 디멘터가 열 두마리쯤 사는 것이 틀림없다. 내게는 너희가 먹고 살 만한 희망과 행복이 없어 친구들아.
내일은 1교시니까 얼른 자야지. 일찍 잘 것이다. '섬유유연제가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활짝 웃어.'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빨래를 하고 있으니, 세탁기만 마저 돌리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꽃담초, 다우니 보라색을 거친 나는 다우니 분홍색 섬유유연제를 쓰고 있다. 아주 잠깐 지난 역사를 떠올린다. "이게 비싼거야."하고 꽃담초 섬유유연제를 추천해준 사람을 꽤 오래 생각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다우니 보라색 향기가 나더라."하던 친구를 무척 빠르게 스쳐지났다. 손에 남은 다우니 분홍색 향을 맡다가, 이걸 사던 날 친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는 미소 짓는 것에 성공했다. "섬유유연제는 몸에 좋지 않은거야."
오늘 밤 꿈에 디멘터가 나와도 나는 자신이 있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하거들랑, 다우니 은백색 패트로누스가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다. 세탁기야 마저 돌아라. 엎질러진 섬유유연제는 주워담을 수 없다. 다만 마른 뒤에도 진한 향기가 남는다. 무슨 무슨 글을 쓰려다 결국 섬유유연제 같은 소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이딴 글이나 쓰면서 빨래를 돌리고,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며 이딴 글을 읽어주는 삶을 살고 싶긴 하니까. 원하는 삶이 절반정도 이루어진 것인가. 몹시 뿌듯한 빨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