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사라질, 캠퍼스에 있는 영화관의 상영표에는 내게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보다 빨리 상영하는 영화를 선택했다. 그제야 영화의 제목을 천천히 발음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당장 어제 예비군 훈련 3년 차를 마치고 온 남자가 이입하기엔 대상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분명 그 문장은 나를 위해 준비된 문장이었다. 밤은 짧다. 걸어야 했다. 나는 아가씨여야만 했다. 사전지식이 조금도 없는 영화를 보러간다는 사실에, 설레기 시작했고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지.
물론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영화관에 들어갈 적에는 비교적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객 수는 7명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호레이쇼 슬러그혼에게 질문하는 톰 마볼로 리들 생각을 했다. “교수님, 7은 마법의 숫자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영화를 단 7명이서 나눌 수 있다면 말이죠…” “오 리들,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관객이 7명이라면 그 영화관은 망해버릴 거야.” 그때쯤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만에,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할 일본 애니메이션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조금 후에는 내 평가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할 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관을 나서 2시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보다 나를 매료시킨 영화가 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흥분 상태에서 글을 적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습관인지 귀에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래야 하는 순간도 있다고 믿는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내게 그 영광의 순간을 선사한 영화다.
내 글의 예상 독자인, 일상 반경 속 모지리들, 놈팡이들, 거렁뱅이들은 모두 이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은 여기서 끝내면 된다. 어차피 내가 겪은 환희를 글로 옮겨낼 재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바쁜 일상이 있다거나, 굳이 그 정도로 나를 아끼지는 않는다거나, 혹은 친구인 척하는 거짓말쟁이라거나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밤을 걷는 아가씨의 이야기다. 원작 소설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져 있지만, 영화는 단 하룻밤만을 다룬다. 영화는 많은 부분을 각색했지만, 핵심은 하나다. 아가씨는 하룻밤 동안 걷고 있다. 봄밤에 술을 마시고, 여름의 헌책 시장에 다녀오고, 학교의 가을 축제에 참여하고, 겨울 감기에 걸린 사람들의 병문안을 간다. 다만, 하룻밤 동안 말이다. 그리고 모자란 선배 하나가 그녀를 뒤따라 걷는다. 소설이 가져다주는 텍스트의 아름다움, 만화적 표현이 가져다 주는 자유로움, 영상이 담아내는 흥겨움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젊음과 나이 듦, 패기와 완숙함, 사랑과 고독, 그 모든 맛이 한 잔에, 하룻밤에, 한 컷에 담겼다. 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던 첫 장면은 봄밤의 술대결이다. 남자 팬티를 수집하는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노인 ‘이백’은 그의 취미만큼 괴상한 제조법이지만 맛만큼은 훌륭한 술인 ‘모조 전기 브랜디’를 가지고 있다. 길거리를 거닐며 술을 마시던 검은 머리 아가씨는 이백을 만나 술 대결을 펼친다. 술꾼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술이 사람을 마신다. 모조 전기 브랜디는 이백을 마시며, 인생의 고독과 씁쓸함에 대해 늘어놓는다. 동시에 모조 전기 브랜디는 검은 머리 아가씨를 마시며, 인생의 따스함과 환희에 대해 늘어놓는다. 대결의 승자는 아무래도 검은 머리 아가씨지만, 이백의 중얼거림도 마냥 흘려들을 수 없다.
아가씨는 다시 조금 걷기 시작한다. 헌책 시장에서 아가씨는 헌책 시장의 신을 만나고, 웃돈을 얹어 책을 가둬놓는 이백에 맞서게 된다. 앞선 봄밤의 술대결에서 아가씨를 따라다니는 선배는 그저 팬티를 뺏기는 엑스트라였지만, 이제는 조금 더 비중이 커진 단역이 된다. 아가씨가 찾던 어릴 적의 동화책 ‘라타타탐’을 찾기 위해 이백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아가씨 앞에 모습을 보이진 못한다. 다시 아가씨는 걷고, 어느새 학교의 가을 축제다. 팬티총대장의 순애보가 연극으로 펼쳐지고, 축제 사무국장과의 추격전도 이어진다. 이쯤에서 영화 홍보를 한 번 더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면 영화를 봐야 한다. 선배와 아가씨는 축제 연극 무대에서 재회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선배는 결국 감기에 걸려 자취방에 몸을 뉜다.
마침내 겨울, 이백이 옮긴 감기로 인해 모두가 앓아누웠고, 아가씨는 모두의 병문안을 다닌다. 아가씨는 서로 이어진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타마고자케다. 이백에마저 삶의 의욕을 불어넣은 아가씨에게 이백은 더 지독한 감기가 있다며, 선배를 찾아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엔카 ‘곤돌라의 노래’의 소절 ‘인생은 짧으니 사랑하라 아가씨야.’가 울려 퍼지며, 아가씨는 그저 어쩌다 마주친 선배를 위해 거센 바람을 뚫고 걸어간다. 마침내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밤은 끝이 난다. 너무 짧은 밤이야, 더 걷게 해줘.
영화든 뭐든, 무엇인가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인간 역사를 선도해왔다. 그런 것은 없다거나, 소시오패스 신에 대한 믿음이라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전체 사람의 반을 소멸시킨다거나 하는 대답들 말이다. 스물다섯 내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 대답이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두고 술을 마시고 싶다. 나는 언뜻 봐도 2500자는 되어 보이는 이 글을 통해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하거나 그럴싸한 의견을 내놓지도 못했다. 애초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다. 이 영화를 나누기에 7명은 너무 적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 봐줘. 어느새 밤이 발목에 내려앉았다. 아가씨가 속삭인다. 밤은 짧아, 걸어 아저씨야. 봄밤의 술대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