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래를 보고 살아야 행복하다고 들었다. 어릴적엔 그 말을 들으면서 끄덕거리기도 했고, 남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나니, 아래와 위를 나누는 기준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아래를 보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문장을 영영 떠나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준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탄생되어 강의실에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충 감각되는 법이다. 나 또한 그 감각을 나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선명해졌고, 그 때 내게 말을 전한 형과는 제법 다른 가치관으로 삶을 사는 것도 같다. 이제 나는 아래와 위를 가르는 기준이야 말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무엇이라고 감각하고 있다. 이제 나는 나보다 못난 타인을 상정하고 버릇없이 굴던 인간들과 나보다 잘난 타인을 선망하느라 주화입마에 빠지는 인간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아래를 보건, 위를 보건 둘 다 결국 한심해진다. 그 군상 속에 나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겠으나, 그 군상 속에 몸을 끼워넣고 싶은 욕망은 분명 사라졌다.
내가 페미니즘과 관련한 수많은 슬로건 중 좋아하는 것은 하나 뿐인데,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쯤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삶의 우열을 제시하는 기준 자체를 적대하는 동시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삶의 퍽퍽함에 맞서 나갈 연합군이다. 우리는 서로의 전우이고, 우리는 서로의 용기이며, 우리는 서로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삶의 보증수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 물론 나는 매순간 이렇게 살기엔 너무 속물인지라, 적당히 취기가 올라 추억팔이를 늘어놓을 때에만 이러고 산다. 술잔을 따라 흐르고 넘치는 말들, 그래도 잔을 부딪히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의 용기야. 그렇게 믿자.
모든 출구 없는 문장들이 그렇듯이, 이 문장도 마냥 되새기는 사람에겐 독이 될 것을 안다. 가족이니 어쩌니 하면서, 나약한 자신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숨겨보려는 인간들만큼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또 없다. 그것 역시 또다른 주화입마이지 않나? 그래도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는 순간들에 나는 모모씨들을 용서하며 건투를 빌어줄 테다. 악다구니가 늘어나는 사람들 속에서, 너무 아프지는 말아달라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이 요즘의 내 모습이다. 전투에서 실패한 장수는 용서해도, 배식을 실패한 장수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먹고, 마시고, 다시 삶을 이야기하자. 일상의 패배는 잊고, 다시 삶을 이야기 하자.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