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오월 광주.
나는 항상 저 네 글자에서 팽팽하게 죄어오는 올가미를 떠올리고 만다. 무엇인가를 질식시키기 위해 느긋함없이 다가오는 올가미. 대체 그게 무엇일까, 여러 번 생각해보아도 명확한 답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멜로디일까. 아니면 붉은 글씨로 거리마다 걸려있는 현수막과 그 밧줄일까. 여전히 구 도청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일까. 하지만 명쾌한 답을 얻어내지 못한 사유가 대개 그렇듯, 광주와 올가미에 대한 형상은 잠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작년에는 학생회 활동을 하며 광주에 다녀온 후 광주항쟁 37주년 추모 성명을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광주의 다른 이름 빛고을을 이야기하며, 역사와 그 빛깔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적었다. 하지만 그 글에서도 나는 도시를 둘러싼 팽팽한 올가미에 대해 다룰 자신이 없었다. 도시와 사람을 고립시키고 목 조르는 거대한 올가미,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첫 장을 넘겨보며 마주한 ‘도청’이란 단어에서 흠칫한 사람들이라면, 뜨겁고 팽팽한 우리 현대사를 제각기 더듬을테다. 각자 광주를 떠올리며 가슴 속에 간직한 이미지는 다를테지만, 나의 경우 이 책은 오월 광주를 둘러싼 올가미일 수밖에 없었다. 올가미를 쓸어내리듯, 책장을 넘겨야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오월 광주와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잔인함과 폭력성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가치판단과 묘사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잔인한 문장들이 상처를 벌리고 그 틈에 소금을 뿌린다.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그 상처는 우리 공동체의 것이고, 그 고통 또한 우리 공동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월 광주에 빚을 지고 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그 빚을 기억하고 계시는가요?’ 묻는다. 국가의 존재 이유, 국가 폭력과 개인, 공동체의 비극이 남긴 후유증,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갉아 먹는 것들 말이다.
소설은 그 날 밤 도청에서 죽어간 열다섯 동호로 시작한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동호의 근본적인 물음 앞에, 여전히 전두환이란 자가 광주가 폭동이라 망언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당당할 수 있는가. 동호의 이야기가 끝나면 소설은 야산에 버려진 정대의 영혼에 다가간다. 그의 피 흘리는 눈동자와 마주하고 움찔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달이 밤의 눈동자라면, 광주는 시대의 눈동자였다. 여전히 그 눈동자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왜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트럭에 싣고 어디로 갔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하며, 광주를 담은 희곡의 검열 문제로 뺨을 맞는 은숙이 있다. 그녀 역시 도청에서 광주를 살아냈던 인물이다. 동호가 죽은 이후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을 사는 그녀의 모습은, 검열로 인해 대사를 뱉지 못하고 소리 없이 끅끅대는 연극배우의 페르소나다. 노조 활동을 하다 쫓겨나 광주에서 생활하게 된 선주는 ‘고귀한 우리’를 믿었다. 하지만 항쟁 이후 연행된 선주가 겪은 고문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옮기기조차 두려운 경험들 속에서도 그녀의 고귀함에 대한 신념은 살아남았을까? 개인의 신념을 지켜주지 못할망정, 짓밟아버린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반복되는 고문과 끔찍한 수감생활 끝에 출소했지만,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진수의 삶 역시 참담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은 이들의 목소리를 빌어 절규하듯 묻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은 동호의 어머니를 위해 남겨져 있다. 독자들은 어딘가 유쾌한 구석이 여겼던 광주 말씨가 그토록 구슬프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막내아들을 잃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꽃 핀 쪽으로 가자는 어린 동호 때문에 가슴 미어지는 어머니는 삼십 년 동안 그 이야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동호 어머니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소설은 한 톨의 행복도 남기지 않고 막을 내린다. 마치 이 거대한 올가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잠시만 몇 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대통령은 광주 항쟁 추모식을 더 이상 찾지 않았고, 국가보훈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 시비를 걸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사회 정의보다 우선시됨에 따라, 죽은 자가 앞서서 나간 길을 산 자가 따르기 결코 쉽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가 비극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졌는가? 광주의 참상은 38년이 지난 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어머니들의 목소리는 경찰이 쏘아댄 물대포와 캡사이신에 맞서 광화문 광장 한 켠을 메우고 있었다. 검열 문제로 뺨을 치는 형사는 없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국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관리하는 시대를 걸어왔다. “왜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정대의 피 흘리는 눈동자에 가득 찬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헬기의 총탄 발굴 작업이 시작된 것은 무려 37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광주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를 지켜보는 피 흘리는 시대의 눈동자는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여전히 목 언저리에는 서늘한 올가미의 감촉이 스친다.
2016년 5월, 한강 작가는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
작가가 수상 소감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시차로 인한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잠에 빠져있었을까? 그로부터 6개월 후, 잠든 광장에 촛불이 등장했고 그 이후는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1980년 5월과 1987년 6월을 이어받은 또 하나의 역사 말이다. 도청에서 죽어간 시민군 한 분인 윤상원 열사는, “내일의 역사가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오월 광주의 숭고한 빛깔을 정말 기억하고 있는가? 광주의 진실을 두고 시비를 거는 정치세력들을 파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시민 윤리를 제고하고, 국가 폭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노력은 이어지고 있는가?
책의 제목을 다시 읽어보자. 소년이 온다. 소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분명 소년은 멈춤 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의 목 언저리에 걸쳐 있는 올가미를 풀어내고, 우리는 소년을 따뜻이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꽃 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절망을 훨훨 털어내고, 새 시대와 그 주인이 온다. 소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