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31
1. 시시한 인간사에 파묻혀 살면, 결국 시시한 인간이 된다. 하지만 본래 그런 인간인지라, 원체 시시한 인간들을 사랑했다. 한동안 외면하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쉬이 그들에게 등 돌릴 생각이 없다. 언제나 넘치는 슬픔과 사랑은 시시한 인간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신호를 어기고 횡단보도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유로, 택시에 화를 내며 봇네트를 후려치는 시시한 인간을 어찌나 사랑하는지.
2. ‘나’라는 1인칭 뒤로 길게 내려앉은 자신과 세계의 관계맺음이 있다. ‘너’와 ‘그들’에 핏대 올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단단한 ‘나’로 무장해 있다. 자신의 세계에서 타자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종종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으나, 그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소거하려는 사람들.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며 무지의 장막 뒤로 피난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전지전능을 꿈꾸는 사회에서 무지무능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시시한 사람들. 그래서 ‘나’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3.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 요즘은 무엇을 고민하며 사냐고 묻길래, 말을 얼버무렸다. 진정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걸까. 입맛에 맞는 문장을 찾아 읽고, 일상의 팔다리가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부끄러워 말을 얼버무렸다. 이렇듯 무엇인가 고민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살면서도, 시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분열을 뜻하는 걸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깊어지기는 커녕, 분절된 자아들이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하는 통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난춘이 끝나고 수심이 깊어지는 계절에 극적인 화해를 했다. 염세적인 보수주의자가 되느니 운명론적 진보주의자로, 감투와 명예보다는 시시한 사람들에게로.
4.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육화의 과정이 있다고들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허의 리를 실로 변환시키는 존재 형성의 과정. 이 지점에서 다들 적당함을 이야기한다. 나름의 노력과 나름의 최선을 이야기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행동하면 괜찮은 것이라고. 하지만 한동안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체용된 허의 리 역시 세상에 의해 시험대에 오르지 못한다면 실로서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론적 진보주의자로, 시시한 사람들에게로. 수시변역 이종도, 때에 따라 변하면서도 도를 쫓는다는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