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어느 가족>까지.

by 취생몽사


 추석에 한바탕 난리를 쳤던 난삽한 칼럼글은 독자로 하여금 '~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종용한다. 비록 칼럼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겠으나, '~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진 폭발력이란 가공할 만한 것이다. 제법 친숙한 개념 뒤에 '~이란 무엇인가?'하는 구절이 따라붙는다면, 이는 곧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자 재정립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더 나아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작업에 임하여 세상에 소개하는 사람은 더욱 흔치 않다. 때문에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작업물을 거듭해서 내놓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분명 흔치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시작한 문제의식이 <어느 가족>을 통해 집대성 되었다. 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먼저, 2013년 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자. 여담으로 이 영화는 사실상 집에는 잠만 자러 들어오던 고레에다 감독이 어느날 집을 나서는 자신에게 딸이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라고 인사한 것에 충격을 받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고레에다 스스로를 책망하듯 만들어진 주인공 료타는 성공한 엘리트 건축가로, 아내와 6살짜리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 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는 워커홀릭으로, 휴가는 커녕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다. 또한 내심, 아들이 경쟁심도 부족하고 어딘가 둔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던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료타의 아들, 케이타는 사실 그들 부부의 친자가 아니었고 그들 부부의 친자는 류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부부에 의해 길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류세이가 길러지고 있던 유다이네 가족은 료타의 가족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유다이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은 물론, 체면이나 예의도 별로 차리지 않는다. 다만, 유다이는 자신의 아이들과 가정에 한없이 따뜻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 한다. 엇갈린 혈육과 양육의 주체들은 서로의 자식 문제를 두고 고심하게 되며, 이후 영화는 두 집안을 오가며 소동극의 형식을 취한다. 료타는 자신의 트라우마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마주하고, 아이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고 마침내 제목처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마냥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자식이 바뀐 부모의 마음이야 분명 황망할 것이나, 그 회복을 위해 소모되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케이타와 류세이의 아픔과 눈물이 두 집안을 이어주고 료타를 아버지로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정자/난자 제공자가 아버지/어머니라는 이름의 육아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전달하는 가족 영화다. 다만, 그런 가족 영화들 중에서 눈에 띄게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다루는 좋은 영화다.
 
 그리고 5년 후, <어느 가족(일본어 원제:좀도둑 가족)>이 개봉했다. 아무래도 고레에다 감독의 문제의식은 5년 간 조금 더 과격하고 위협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 혈육과 양육의 대립을 넘어, 감독은 조금 더 본질적으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자체를 겨냥한다. 이들은 등장부터 어딘가 가족이라기엔 조금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연금을 통해 실질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하츠에 할머니, 일용직과 도둑질을 전담하는 오사무, 세탁 업체에 다니는 노부요, 성판매 여성인 아키, 마지막으로 오사무를 따라 도둑질을 배우는 소년 쇼타의 이야기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혈연을 통해 이어져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은 좁은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삶을 공유하고 있다.
 오사무와 쇼타가 도둑질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유리라는 이름의 버려진 아이를 데려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쇼타네 가족은 부모의 학대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인 유리를 돌보기로 하며, 어딘가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이들의 동거가 시작된다. 가족의 구성과 서사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는 좀도둑질이다. 노부요와 쇼타가 도둑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등장하는 대사가 그렇다.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오사무의 철학은 스크린에 굴절되어 '우리는 단지 태어난 것만으로 가족이 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것이 영화의 순리듯, 언제나 숨기고 감춰야 하는 가족의 폐쇄성에 이골이 난 쇼타는 탈출을 시도한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자신을 흉내내 물건을 훔치려는 유리를 지키기 위해, 부러 물건을 훔치다 걸린 쇼타는 도망 끝에 추락하여 다리를 다치게 된다. 경찰조사 끝에 쇼타네 가족은 감옥에 가는 노부요를 비롯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현실의 무게를 잘 아는 감독인만큼 영화는 "우리 역시 가족입니다."라고 외칠만한 순간에도 끝끝내 그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사무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못한 채 속으로 '아빠'하고 중얼거리는 쇼타가 그렇다. 빈 집을 기웃거리는 아키나, 여전히 집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유리의 눈빛이 그렇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마찬가지로, <어느 가족> 역시 쇼타의 고통을 매개로 극이 진행된다. 하지만 아이를 대하는 영화의 시선은 보다 주체적으로 변화했다. 전작에서 매개물 역할을 하던 케이타와 류세이에 비해, 쇼타는 훨씬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극을 보다 과감하게 이끌어 나간다. 고레에다의 성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가족이란 혈연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던 고레에다는, <어느 가족>을 통해 과격하고 극단적인, 동시에 섬세하고 따스하게 가족이란 형태를 재정의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매혹적인 영화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흔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일컬어 '가족영화'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영화를 '가족영화'라 부를 적에, 우리가 '가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먼저 점검해야 한다. 그의 가족은 마냥 따스하지도, 마냥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낱말이 인간과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근본적이고 위협적인 질문 앞에서 마땅한 대답을 내놓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영화가 끝나고나면 누구나 ‘그럼 당신은 아이들에게 뭐라고 불려왔습니까?’라는 경찰의 질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노부요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족으로 부르고 있을까. 마침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분명히 선언한다. 가족을 뒷받침하는 복지제도나 사회적 합의, 그 이면에 인간과 관계에 대한 고민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숨쉬고 있어야만 함을 말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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