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도우 복싱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by 취생몽사

석양을 등지고 걸음을 내디뎌 본 사람은 자신 앞으로 길게 내려앉은 그림자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그 그림자를 무심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그 그림자에 삼켜질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밤마다 그림자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상상에 숨을 헐떡대고, 누군가는 그림자를 향한 증오로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니체는 우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이기에 정오가 위대하다고 이야기했는가? 정말 그러한가? 우버멘쉬는 커녕, 나약하디 나약한 사람들에게 정오가 위대한 것은 다른 이유 아니겠는가?

종종 가던 가게 사장님이 지난겨울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는 체격도 좋고 인상도 좋은 사람이었기에 황망하다고 여기던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누구나 삶에서 빛과 어둠이 차지하는 비율은 반반이었을까. 왜 겉으로 밝은 사람들이 항상 저마다 깊은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고 했다. 보험사와의 문제 때문에 실족사로 처리되었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 높은 곳에서 어떤 그림자를 마주했을까. 왜 내려놓고 싶었을까. 무엇이 그를 더 이상 빛이 들지 않아, 그림자도 없는 곳으로 인도했을까.

가끔 나는 이 쉐도우 복싱이 제법 버겁다고 느낀다.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인간의 선한 면을 곁눈질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방으로 돌아올 적엔 혼자라는 것도 안다. 내 그림자가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이 있다. 방의 수심이 깊어지는 때면 항상 무섭고 외로워진다.

적어도 나는 현대인의 절반과 마찬가지로 그림자와 함께 살아간다. 나를 갉아먹는 그림자들이 가슴 언저리까지 차오를 때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만다. 이 몸뚱어리 밖 세상 구석구석에 비참이 똬리를 틀고 있는데, 왜 고작 너는 이런 것들에 얽매여 있는가. 적확한 질문임에도 그림자를 몰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나의 구원은 거울 앞에서 더 나은 자신을 맞이할 적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애저녁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건방진 사람, 자의식에 충만한 사람, 재수 없는 사람. 자꾸 그림자가 속삭일 적에, 나는 마땅히 아파해야만 한다. 세상에 내뱉어진 낱말엔 그에 합당한 가격표가 붙어있다. 나더러 아파하라 던져진 말들에, 나는 응당 아파해야 한다. 그림자가 목까지 기어올랐다.

겨우 식혀도 무기력함과 자기 혐오는 피부에 열꽃처럼 피어난다. 나는 담뱃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삶의 관성은 다시 나를 바깥으로 이끌고, 조금 창백해졌지만, 더욱 단단해진 내 모습에 감탄한다. 이제 나는 냉소와 환멸을 가슴 가까운 곳에 묻어두었다. 나는 더욱 시건방진 사람이 된다. 더욱 자의식에 충만한 사람이 된다. 혹자들이 재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너의 증오의 문장들에 아파했고, 이제는 너의 증오의 문장을 완벽하게 해주는 사람이 된다. 너는 옳다. 내가 너를 옳게 만들었다. 다시 나는 그림자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종종 일상이 휘어지는 순간에 나는 이 쉐도우 복싱이 다시금 버겁다. 그리고 회귀한다.

그럼에도 내가 결국 살아남은 이유는 나의 경계가 뻐끔 열려있기 때문이다. 가끔 아주 가끔, 내 시야 바깥에서 내리쬐는 사람들이 있어 모자란 나를 일깨우고 인생의 스승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사람들, 다만 언제고 여기서 너와 네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들. 얼마 전 대화를 나눈 나의 새로운 스승님처럼 말이다.


그는 내게 “그림자가 싫냐”고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다. 싫고 좋고의 개념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 얘기를 다 듣던 그가 “아프지 마”하고 대답해주었다. 식상한 위로였다. 아프지 않으려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 소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나의 삶이 아프지 않을 운명 속에 놓이길 빌어주었다. 아프지 않으려고 노력하길 빌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럼 언제고 아플 때마다 마치 네 노력이 덜해서 아픈 거 같지 않냐고 했다. 나는 침묵했다. 멍청한 질문도 식상한 위로도 아니었다. 그는 내 시야 바깥에 서 있었다. 나의 뻐끔 열린 경계로 그가 문장을 꽂아 넣었다. 아이고, 스승님.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사실 제법 뛰어난 주술사였다. 나는 주술이 사라진 시대를 걷는 사람임에도, 그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깟 그림자 전부 죽여주겠다고 했다. 모두가 나의 그림자를 위로할 적에, 그는 오히려 내 그림자와 대신 싸우겠다고 이야기했다. 내 손에서 글러브가 미끄러졌다. 나는 그가 제법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언젠가 그에게 받은 구원이 되려 나를 갉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 치워두었다. 나는 그의 충직한 제자가 되기로 했다. 나도 주술을 연마하여 누군가의 그림자와 맞서 주기로 했다. 손에서 미끄러진 이 글러브를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다.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디려는 사람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그림자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는다면, 그의 그림자와 맞서 싸우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격적인 가르침에 앞서 스승은 만학도 제자에게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를 각오가 되어있냐고 물었다. 말보단 글이 익숙했던 제자가 사춘기 아이마냥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썼다. 스승은 이 수줍은 대답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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