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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소개팅

600명쯤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에 50명 남짓한 사람들이 남아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불과 300~400미터 떨어진 곳에선 축제 주점이 진행되었다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나를 비롯하여 다수의 열람실 이용자들은 2차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과 몇 백미터를 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를 맞아가며 주점을 했던 개고생의 추억과 트랜지스터 앰프로 인해 역겨움을 느낀 추억이 싹트고 있다. 언젠가 그들이 소개팅 같은 것을 하게 되어 서로 마주하고 추억을 나눈다면 어떨까. 당연히 주선자 욕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한다면, 축제와 트랜지스터 사이에도 연결고리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일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하지만 존재한다면 나름 뜻깊을 인연을 위해 쓰는 글이다.

먼저 트랜지스터는 머리, 가슴, 배로 이뤄진 곤충이다. 응, 아니다. 물론 트랜지스터를 곤충이라고 해도 큰 위화감은 없지만, 베이스, 콜렉터, 이미터로 이뤄진 회로소자라고 말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하다. 적당한 전압을 적당한 위치에 걸어주면, 적은 전압으로 큰 전압을 제어할 수 있다. 이걸 증폭이라고 부르고, 얼마나 증폭시키느냐가 결국 트랜지스터의 Gain, 즉 이득이 된다. 전자회로 2차 시험의 주 내용은,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머리, 가슴, 배…가 아니라 베이스, 콜렉터, 이미터에 온갖 지랄생쇼를 하는 것이다. 부분을 조금씩 바꾸고 조절하여, 전체 트랜지스터의 이득을 설계한다. 이건 비단 트랜지스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조선의 전기전자 공대생들은 전 커리큘럼에 거쳐, 모델의 효율성을 위해 조금씩 부분을 바꿔 나가면서도 안정성을 추구하다가 참사가 일어나고 수정 보완하는 법 같은 것을 배운다. 공학이 원래 그렇다. 전체가 없으면 부분도 없지만, 부분을 바꿔가며 전체를 바꾼다.

축제를 진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여기엔 아직 인간미가 남아있다. 조선의 대학 축제는 주간 기획, 무대 공연, 주점 지옥으로 이뤄져 있다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열심히 준비한 무대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사람들에겐 축축한 무대가 곧 축제다. 비오는 와중에 주점으로 고생했을 사람들에겐, 고생한 기억이 곧 축제다. 부스에서 팜플렛을 나눠주는 사람들이나, 취객을 옮기고 연신 뺨을 휘갈기는 사람들에게는 축제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축제의 전경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축제나 집회, 광장 등에서 전체의 의미만을 쫓는 시도는 얼마나 엄밀한 시도일까. 혹은 반대로 축제나 집회, 광장 등에서 전체를 부분으로만 환원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엄밀한 시도일까. 원래 사는 게 좀 복잡다단하지 않나. 부분으로 전체를 말할 수 없으나, 전체는 결국 부분들의 합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두 사람이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고 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누가 소개팅에서 하냐고 생각하겠지만, 이젠 무한도전이 종영했고 “지난주 무한도전 보셨나요?” 같은 멍청한 질문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혜화역 집회를 두고도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집회에는 피해자에게 2차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피켓도 등장했고, ‘재기해’라는 구호도 계속해 등장했다 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또 다르다고 했다. ‘재기해’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쪽지를 돌리거나, 중지 손가락으로 욕을 하지 말자(아마 추측하건대, 페미니즘 집회에서 강간을 암시하는 욕설이 사용되는 것을 막고자 함인 것 같다.)고 했다 들었다. 그래서 소개팅에서 만난 이 친구들은 집회 전반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도, 부분적으로 표출된 폭력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웃으면서, “원래 사는게 좀 복잡다단하잖아요?” 하고 이딴 파스타 대신에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한 뒤에 한 150일쯤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별 관심이 없거나, 냉소와 혐오가 너무 심한 나머지,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들다면, 스스로의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떤가. 아무래도 개인(individual)은 더 이상 나눠지지 않기에(in+divide) 개인인 것 같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통으로 된 자아를 갖고 산다는 말인가. 당신이라는 전체 안에도 여러가지 부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곧 산업 역군이 되어 이 사회 GDP를 위한 톱니바퀴가 되길 자청하는 취업준비생 나와, 커피를 내려 성북천을 걷고 싶은 나, 일주일에 세번 이상 술을 진탕 마시고 싶은 나, 가끔씩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싶은 나, 뭐 이런 것들 말이다. 무엇이 우리를 대표하는가? 내가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시간이 과반을 넘긴다 하여, 나는 취업준비생인가? 나는 산책 애호가라거나 술꾼으로 대표될 수는 없는 것인가? 드라마 뉴스룸에서 윌 매커보이가 “나는 본업이 기타리스트야, 부업으로 방송을 해.”라고 이야기할 적에 끄덕거린 사람 제법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각자를 대표하는 자아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역시 파스타 집은 때려치우고 맥주를 먹으러 갔다가, 200일쯤 후에 헤어지게 될 지 모른다.

소개팅 나가는 당신의 두 어깨에 트랜지스터와 주점, 그리고 열람실 앞 고양이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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