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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생각나는 날에

보문로 26길

집 앞 까페가 언제 생겼는지를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내겐 아이폰과 인스타그램이 있으니깐. 뒤적거려보니 바로 날짜를 찾아냈다. 3월 22일이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까지 한 15번 정도 온 것 같으니 나흘에 한 번은 온셈이다. 이쯤되면 절 기억하시나요, 사장님? 아아 레귤러 커스터머, 까페홀릭.

사장님은 30대 초반쯤 되셨을까, 큰 키에 항상 깔끔한 옷차림이시다. 사장님의 외모는 내게 고등학교 도덕 선생님을 연상케 했다. 당장이라도 악의 평범성에 대해 설명하실 것만 같다. (그 도덕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별로 없지만, 대학에 대한 환상을 처음 심어준 분으로 기억한다. “대학에 가면, 평생을 함께할 친구나 애인을…” 뭐 그런 이야기였다. 정작 본인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만.) 하지만 사장님이 한나 아렌트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애인 분이 하이데거처럼 생각되지는 않듯 말이다. 저녁 시간이면 항상 애인 분이 나타나 가게 일을 돕는다. 항상 청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면바지나 슬랙스를 입지도 않는 것 같다. 구두는 요원해 보인다. 왠지 수더분하나 정감이 있다. 나는 왠지 그분이 건축 관련 업무를 하고 계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가구나 실내 인테리어. 목재를 적절히 활용한 베이지 앤 화이트 톤의 가게 모습에서 그분의 손길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쪽엔 문외한이다만 굳이 떠올리자면 일본풍이랄까. 조명 배치 역시 그렇다. 까페 이름이 ‘동경산책’ 아니면 ‘비내리는 신주쿠’쯤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곤돌라의 노래> 같은 엔카가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음악은 직접 선곡하는 것 같은데, 클래식과 재즈가 섞여 나온다. 동시에 전체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요도 종종 나온다. 게다가 매일 조금씩 바뀌는 것도 같다. 이건 사장님의 폭넓은 음악 취향으로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커피가 생각나는 날에’, 줄여서 ‘커피날에’라는 까페는 내게 음대에 진학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사장님과 건축업에 종사하는 애인이 꾸려가는 가게쯤 된다. 이정도 발칙한 상상은 용서해주시겠죠, 사장님? 커피, 음악, 화이트, 건축, 디자이너, 목재, 베이지. 아아 마이 드림, 성공적, 로맨틱.

메뉴를 전부 먹어본 것은 아니지만, 아메리카노가 제법 좋다. 아인슈페너는 제법 괜찮은 축에 속하고, 말차라떼는 차라리 우리 집에서 해먹는 게 낫다. 더블 초콜릿 라떼는 잘 나가는 이유를 알겠지만, 베스트 초이스는 아니다. 이 집의 즐거운 점 하나는 잔이 너무나 예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장님은 사진 좀 찍어본 분이 분명하다. 내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만, 많은 사람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빵 종류도 판매한다. 집이 코 앞인지라 밥을 먹고 까페를 찾는 일이 많아 굳이 먹어보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들 주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월세는 얼마쯤 될까. 80만원? 100만원? 한 달에 250만원 정도 수익을 올리려면 얼마나 팔아야 할까. 400만원 정도 매출을 올리면 될까. 이곳의 아메리카노는 3500원이다. 대충 계산해도 1000잔을 넘게 팔아야 한다. 하루에 35잔꼴이다. 달콤한 커피를 마시면서도 쓴 침이 고인다. 인생이 초콜릿 상자라는데, 정말 그렇다. 돈이 있어야 뜯어볼 수 있잖아요. 아닌가요, 사장님? 아아 머니 퍼킹 머니, 크루엘 리얼리티.

오늘 목표했던 트랜지스터 앰프 자료를 다 보고 나서 20분만에 이런 문장을 마구 적어내렸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직 전압 이득을 명확하게 설명할 용기가 나지 않는데도? 그래도 시작한 문장은 끝을 내야 하는 법. 고작해야 두 달을 드나든 이 산뜻하고 수수한 까페가, 밤을 따라 걷는 이로 생의 의욕을 퍼나르는 예술가와 부딪혔다. 그 충돌 속에 떨어져 나온 무엇의 이름을 나는 알고, 너는 안다. 음악과 사람을 이어주는 신이 있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동화를 떠올렸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자신있게 이야기한 광장의 가수를 떠올렸다. 이 온기를 품고 사는 이 까페,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아아 트루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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