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을 동 자에 뜻 지 자를 씁니다. 같은 뜻을 가진 관계라니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또 우리말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을진대, 같은 뜻으로 뭉친 관계와 함께 나아가면 그 여정 또한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저 역시 동지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사실 선배 세대의 느낌과는 조금 다른 것도 같습니다. 낱말이 가지는 지시적 맥락이 변화된 현실 속에 다른 맥락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아예 철자조차 다른 것이 아닌가 할 때가 많습니다. 굳이 동지를 이야기하자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쯤 될까요. 한자로는 땅 지 자를 써야 할 테니, 디디고 선 발 밑을 공유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동지에 관한 이야기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심상정과 김문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TV에 출연한 심상정은 김문수를 설명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김문수의 변절이나 그런 것 말고도 제가 인상싶었던 지점은 동지란 아무래도 서로를 설명할 수 있는 관계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 끝났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제 주변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제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같은 처지이기에 어쩌면 더욱 서로에 대해 적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뜻이 사라진 관계에 우리는 금방이고 길이 나눠질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조만간 서로를 설명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실은 그런 친구들이 이미 제곁에 몇 명 있습니다.
동병상련이 가져다 주는 애정과 연대의식은 디디고 선 땅의 견고함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실 캠퍼스의 군상들 사이에 흐르는 애정이라 해봐야, 학위 가운만큼이나 얇고도 가볍습니다. 그렇기에 군상 속을 흐르는 격론이나 삶의 미학 역시 소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요. 아무튼 날이 갈수록 뜻 있는 이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판에 재능과 열정이 줄어든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위기론이 계속되었다고 하여 이를 그저 뻔한 문장으로 치부하는 것은, 관록이 아니라 안전불감증입니다. 명백히 쇠락하는 조직에 몸 담는다는 것,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개인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갈 곳을 잃은 고민과 사유가 펑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미 소소하다 못해 미미한 이 움직임을 사회의 맥락에 포개어 보십시오. 대체 어디서 의미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개인의 실존도 무의미할 수 없겠지만, 조직의 실존은 종종 무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잠시나마 이 곳에 영혼을 맡긴 우리는 뭘 끌어안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곰인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래도 동지는 옛말입니까.
하지만 왜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는 이 긴 글을 적어 나가며, 고작 무기력함의 표출이나 낭만의 거세를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법이 바뀌어도, 여전히 구식을 추구하는 저는 아직 동지가 옛말이 아님을 역설하려 합니다. 이념에 기성복이 없다는 말처럼, 동지라는 개념을 이리저리 깎아내어 제 몸에 맞춰 입으려 합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가 선 땅이 달라져도 같은 뜻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란 무엇일까요. 조직일까요, 이론일까요, 아무튼 낭만의 정치만을 입에 대기엔 속이 더부룩하니 고민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거듭되면 깊고 수척한 행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뜻 지 자였건 땅 지 자였건, 동지 하나 없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퍽퍽하겠습니까. 고독하다는 것은 단지 계급적 시선을 잃어버리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동지는 결코 옛말일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저와 제 친구들은 서로를 설명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날이 많이 풀렸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