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8.12.16)

by 취생몽사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써둔 글이 모르긴 몰라도 몇 백줄은 될 것이다. <근황>이라는 제목에 빠지게 된 건 4년 전 부대에서 보냈던 이맘때였다. 그 시절은 좁은 골목길 사이를 파고드는 겨울 햇살 같았다. 발버둥쳤지만 분명 외로웠고 하늘은 서럽게도 푸르렀다. 이제 막 코드를 잡기 시작한 기타로 처음 연주와 가창을 해낸 곡이 가을방학의 <근황>이었다.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거나 하지 않고도 “다들 잘 지내나요? 난 별 일 없는데...”하고 중얼거릴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일기 비슷한 형식으로 쓴 글에 ‘근황’이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다.

근황을 묻고 안부를 전하는 일들이 버거운 나날을 보냈다. 오랫만에 학생회 일을 들여다봤다가, 무엇을 사랑하고 증오할 적에도 힘이 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진저리쳤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책을 더 읽고 싶었다. 그런데 음악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게 족히 두 달은 되었다. 요즘 고등 교육 과정이 공통으로 가르친다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 사이 간격을 좁히는 비결도 얻지 못했다. 정말이지 졸업은 어렵다. 졸업요건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뭐랄까 스스로의 자존심을 굉장히 깎아먹는 일인데, 이를테면 영 말같지도 않은 졸업 논문을 분량 채워가며 작성하는 일이 그렇다.

얼마 전엔 오래된 벗이 연락을 해와 공대생 다 되었냐고 안부를 물었다. 사실 그 친구가 잠시 망각한 사건 하나를 짚어주자면, 내가 2012년에 공과대학으로 입학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게 분명해진다고들 하던데, 대학생은 졸업할 때가 되면 비로소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모른다. 친구들 서넛이 취직을 했고, 나도 따라가려면 뭘 하기는 해야할 것 같아서 방학엔 공부를 좀 할 예정이다. 그렇게 겨우내 웅크리고 피내리는 4월을 기다리고 있다. 기사 자격 시험과 기업 지원서, 어벤저스, 왕좌의 게임과 이센스 신보. 삶을 막막하게도 먹먹하게도 하는 것들.

떠나갈 자리를 정리하며, 졸업을 앞둔 자신에 감탄하며. 전자회로 시험과 통신 시험이 남았기에 씻고 카페에 갈 생각이다. 내년엔 학교 시험도 거의 없을테니 아마 이것들이 내가 치뤄내는 마지막 전공 시험이겠다. 기념 삼아 날 그동안 지독하도록 괴롭히던 답안지를 한 장 가지고 나올 것이다. 언젠가 그 넓은 답안지를 받고, 도전 골든벨마냥 “얘들아 미안해.”를 쓰고 나오면 어떨까 궁금해했던 스무살의 내가 있었다. 안쓰럽지도 않고, 기특하지도 않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감각을 닫아두는 것이다. 스무살의 나는 참살이 스타벅스에서 전공 과제는 제쳐두고 글쓰기 강좌 과제를 하겠다고, 가을에 대해 끙끙거렸다. 다만, 더이상 그에게 근황을 묻지 않을 뿐이다. 점점 더 무던하게 산다. 그게 난 퍽 마음에 든다. 요즘 이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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