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진 Jun 26. 2020

제국의 아이러니

《버마 시절》, 조지 오웰

1922년, 갓 열아홉이 된 청년 조지 오웰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미얀마)로 건너가 대영제국의 경찰이 된다. 훗날 사회주의 작가로 날선 정치평론을 쏟아낸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인데, 제국의 앞잡이였던 그를 변모시킨 건 무엇이었을까? 그 실마리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의 첫 장편소설 《버마 시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1920년대 중반, 버마의 작은 도시 카우크타다를 배경으로 한다. 카우크타다엔 유럽의 백인들이 요새이자 피난처 삼아 만든 '클럽'이 있었다. 그곳엔 제국의 관료를 상징하는 지역의 부국장 맥그리거, 극단적인 제국주의/인종주의자 엘리스, 제국의 경찰 웨스트필드, 버마인들을 노골적으로 착취하며 살아가는 산림국장 맥스웰,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놀아나는 래커스틴과 버마인들을 경멸하는 그의 부인, 소설의 중심인물인 플로리가 속해있다. 버마인들도 등장한다. 어떻게든 클럽의 일원이 되고자 온갖 암투를 벌이는 부패한 치안판사 우 포 킨, 백인에게 호의를 보이며 플로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 교도소장이자 의사인 베라스와미, 그 외에 하인과 노리개, 노동자들이 나온다.


플로리는 제국의 수탈 덕분에 살아가면서도 제국에 환멸을 느끼는 복잡한 속내의 인물이다.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그가 절친 베라스와미와 나누는 논쟁은 아이러니하다. "의사 베라스와미는 영국인들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대영제국의 입장을 옹호하고, 플로리는 제국의 "도둑질"을 비판하며 혐오를 보인다. "우리가 도둑질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나라에 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이 말은 이십대의 절반 이상을 버마에서 제국의 경찰 노릇을 하던 조지 오웰의 회상이기도 하다.

 

플로리가 그런 입장을 갖게 된 건, 짐작건대 얼굴 한 쪽에 나있는 커다란 모반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어린 시절 플로리는 모반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어 깊은 상처를 받았다. 열아홉이 되자 도망치듯 버마로 떠나왔지만 과거를 극복하진 못했다. 버마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탐닉하며 음습한 삶에 빠져들어갔다. 모반 때문에 놀림을 당한 건 십수 년도 지난 옛일이지만 콤플렉스는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모반을 부끄러워한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되는대로 살고, 마 홀라 메이라는 원주민 여성을 노리개 삼듯 정부로 두어 혼잡하게 살아갔다.


플로리는 오물 같은 삶에 환멸을 느꼈다. 그 환멸은 제국과 버마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필연이기도 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플로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하면 어김없이 논쟁적인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히브(주인 나리)의 세계가 점점 고통스러웠다." 그런 플로리에게 어느 날 새 희망이 찾아온다. 바로 영국에서 이주해 온 젊은 여성 엘리자베스다. 둘은 더디지만 조심스레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과거에 그가 저질러 놓은 일, 정부 마 홀라 메이가 올무가 되어 그를 옭아맨다.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플로리는 점점 결말을 향해 다가간다.

 

"실내는 어두웠고 비는 지붕을 약하게 때리고 있었다. 바깥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려 노란 잎들이 창문 옆으로 회오리쳐 날아갔다. 플로리는 손가락 사이로 흩날리는 잎들을 보았다. 20년 전 겨울 고국에서의 어느 일요일, 그는 교구 교회의 신도석에 앉아 노란 잎들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잿빛 하늘을 향해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았었다. 더러운 세월이 그를 결코 때 묻게 하지 않았던 시절처럼 다시 한 번 시작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할까?"


한바탕 쓰나미 같던 일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무더웠던 버마에는 우기가 찾아온다. 버마의 하늘은 이제 끝도 없이 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 비가 플로리의 오물 같은 삶을 씻어낼 수 있을까?


파멸 같은 결말은 예고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덕을 보면서 제국에 환멸을 느끼는 아이러니.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를 끝도 없이 괴롭혔던 것은 모반에서 비롯된 콤플렉스이기도 했겠지만 본질은 제국의 덕을 보며 살았던 몸과 제국에 환멸을 느꼈던 마음과의 괴리가 아니었을까. 소설의 다른 인물들은 쉽게 양심을 저버리며 살아갔지만 소수자의 경험을 갖고 있는 플로리에겐 불가능한 일일뿐이다. 극복되지 못한 과거는 결국 다시 찾아오고, 찢긴 몸과 마음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조지오웰 #버마시절 #열린책들 #박경서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작가를 만드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