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 오웰
고등학교 졸업 후 6년간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의 경찰로 일하던 스물다섯의 조지 오웰은 1928년,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오웰은 어떠한 도움도 없이 오롯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시기의 일들을 적은 르포르타주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5)엔 오웰이 대도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들여다본 세상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파리로 건너간 오웰은 콕토르 가의 한 빈민가 여인숙에 터 잡아 살며 영어 교습도 하고 간간이 글도 쓰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절도를 당하고 일도 끊어진다. 몰락은 그때부터였다. 방세를 빼면 남는 돈이 거의 없어 고물상과 전당포에 옷을 맡겨야 했다. 옷이 없으니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고, 아끼고 아껴도 돈은 나가기만 하고 채워지질 않았다. 이제 배곯는 게 일상인 밑바닥 인생이 시작된다.
사람이 처음으로 가난에 부닥치게 되면 아주 묘해진다. 가난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왔다. 이는 평생을 두고 두려워하던 것, 조만간 맛 보리라고 각오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부닥치면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생소하다. 지극히 단순하리라 여겼으나 실은 굉장히 복잡하다. 무시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저 궁상맞고 진절머리가 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은 가난이 지닌 특유의 구차스러움이다. 즉, 마지못해 쓰는 편법, 비굴한 쩨쩨함, 빵 부스러기까지 쓸어 먹는 일 따위이다.(p.144)
그러나 개똥 밭에도 이슬 내릴 때가 있다고, 오웰은 파리에서 만난 친구 러시아인 보리스를 만나 겨우 밥벌이를 하며 지낸다. 괴짜스러운 보리스는 러시아에서 망명 온 장교 출신으로 전쟁을 아름답게 추억하던 절름발이 웨이터였다. 며칠을 굶어도 호탕하게 허풍을 칠 줄 알았고 나름의 낭만도 있던 사람으로, 어떤 면에선 그리스인 조르바가 연상되는 낙천성도 지닌 사람이었다. 오웰은 길바닥 선배 보리스를 쫓아다니다 겨우 한 호텔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특별한 기술이랄 게 없던 오웰은 호텔의 최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접시닦이가 된다.
호텔에서 하는 노동은 정말 정신없는 일이었다. "홍차와 커피와 초콜릿차를 만드는 일,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오는 일, 지하실에서 포도주와 과일 등을 식당으로 가져가는 일, 빵을 자르고 토스트를 만드는 일, 버터를 덩어리로 만들고 잼을 저울에 다는 일, 우유 깡통을 따는 일, 각설탕을 세는 일, 달걀을 삶고 죽을 끓이고 얼음을 부수고 커피를 가는 일, 일이백 명의 손님을 위해 이런 따위의 모든 일"을 단 몇 명이서 소화해야 했다. 중노동은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하루에 몇 리터의 홍차를 마셔야 겨우 일을 해낼 수 있는 무질서 속에서 오웰이 발견한 건 허울뿐인 대도시의 이면이었다.
더럽고 작은 식기실을 둘러보면서 우리와 식당 사이에 이중문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흥미진진해졌다. 티끌 하나 없는 식탁보, 꽃병, 거울, 금박으로 장식한 천장, 벽 사이의 돌림띠, 천사가 그려진 식당에는 손님들이 한껏 차려입고 앉아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곳의 구역질 나는 불결함 속에서 일하는 것이다. 진정 구역질 나는 불결함이었다.(p.214)
대도시의 화려함 이면엔 누추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 식당에 앉아 고상한 클래식 연주를 들으며 교양 있는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세계는 너절하고 더러운 불결함 위에 만들어진 세계였다. 미칠 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주방에서 위생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런 음식이 식당에 가면 일급 요리로 둔갑하기 일쑤였다. 오웰에게 "‘고급’ 호텔이란 200명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것에 터무니없는 호된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100명이 죽어라 일하는 곳"이었다. 대체 어찌 이렇게 우습고도 불합리한 일이 가능했던 걸까?
오웰이 보기에 호텔의 접시닦이는 현대판 노예였다. "대개는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일을 하는 노예"이며, "아무런 기술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접시닦이도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오래전에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처우개선을 위한 파업"이라도 했을 테지만,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생활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예 상태는 왜 계속될까? 예컨대 "하수도 청소는 불쾌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하수도에서 일해야만" 하듯이 "접시닦이 일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야 하니까 누군가가 1주에 80시간은 접시를 닦아야만 한다. 이것은 문명이 안겨준 일이며, 따라서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연 이 모든 일이 "진정 문명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일일까?
노예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조지 오웰은 런던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 바다 건너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치 운명인 듯 알선해 주기로 했던 일자리는 무마되고, 조지 오웰은 다시 밑바닥을 전전한다. 영국에 도착해 <가족용 할인 호텔>에 묶었던 첫날밤은 <독신자 합숙소>, <간이숙소> 등 저렴한 숙박업소로 바뀌어갔고, 하루 세 끼는 사치가 됐다. 한 끼 식사는 홍차와 방 두 쪽, 마가린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접시닦이였을 땐 배는 곯지 않았다는 아쉬운 생각도 스친다. 그러다 오웰은 '스파이크'라는 속어로 불리는 부랑자 구호소에 입문한다. 그곳은 "지독히 혐오"스럽고, "지독스럽게 답답"한 곳이었다.
목욕탕 광경은 지독히 혐오스러웠다. 2제곱 미터의 욕실에 겨우 욕조 두 개와 미끈미끈한 두루마리 수건 두 장이 걸려 있었다. 이런 곳에서 벌거벗은 때투성이 남자 50명이 서로 팔꿈치를 맞댔다. 더러운 발에서 나던 악취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발을 씻은 물을 다시 써야 했다. 수위는 우리를 이리저리 떠밀고 누구든지 시간을 허비할 때는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p.315)
공기가 지독스럽게 답답했다. 하지만 담요를 전부 밑에 깔아도 될 정도로 따뜻하지는 않아서, 딱딱한 바닥에 담요 한 장밖에 깔지 못했다. 우리는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져서 누웠다. 서로의 얼굴에 숨결이 스쳤고, 벗은 팔다리가 노상 닿았고, 잠이 들기만 하면 굴러 맞부딪혔다. 몸을 뒤척거려 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떤 쪽으로 돌아눕든 처음에는 몸이 저리다가 딱딱한 마룻바닥이 담요를 통해 느껴져서 무척 아팠다. 잠들 수는 있었지만 한 번에 10분 이상은 자지 못했다.(p.317)
그 당시 영국에서는 부랑자 구호소에 한 달에 한 번만 숙박할 수 있었다. 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구류되었기에 부랑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구호소와 다른 구호소를 오가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구호소와 구호소 사이엔 부랑자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 오웰은 건달 같은 이들도 만나고, 별을 사랑하는 길거리 화가를 만나기도 하고, 허섭스레기만 먹고 다니다가 육신과 영혼이 타락한 이도 만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런 떠돌이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동차가 좌측통행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그네들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법률이 생겼기 때문이다." 구호소에서 하룻밤 밖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법률 때문에 부랑자들은 계속 움직여야 했고, 구호소와 구호소 사이를 이어주는 길은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다. 하루 종일 다른 구호소로 걸어서 이동해야 겨우 살아가는 부랑자들에게 새로운 삶은 사치였다. 그런 생활을 벗어나고자 무언가 시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랑자들에겐 감옥 같은 길거리를 떠돌며 살아가거나, 아니면 진짜 감옥에 갇히거나 두 가지 삶의 가능성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 감옥은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크게 보자면 파리에서의 체험담과 논평, 런던에서의 체험담과 논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르포르타주라는 형식이지만 전혀 딱딱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오웰의 문학적 재능 덕분이기도 하고, 밑바닥 인생들의 생생한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나 만나볼 법한 이야기들이 구석구석 채워져 있으며, 오웰이 만난 인물들은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오웰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저 있던 세계를 글로 옮겨 놓은 것이지만 오웰이 하기 전엔 이 세상에 증언되지 않았던 세계였다.
오웰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했다. 부모를 설득해 경찰직을 사임하고 따로 살며 글을 썼다. 그가 파리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프랑스어판 서문에 값싼 생활비로 소설을 쓰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갔다는 설명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1928년 봄 파리로 떠나 시작된 '따라지 인생'은1929년 크리스마스 영국의 부모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계속된다. 오웰이 그 기간 동안 거리에서 살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선 완전한 단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것이 시작"이라는 느낌을 찾기까지 배회한 걸까. 오웰의 속내는 영영 알 길이 없으니 그가 밑바닥에서 살며 '가슴 깊이 느낀 점'들을 보고 헤아려볼 뿐이다.
빈곤에 찌들려 봄으로써 가슴 깊이 느낀 한두 가지 점을 집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떠돌이는 전부 불한당에다 주정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거지에게 한 푼 주었을 때 고마워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며, 실직한 사람이 기력이 없어도 아연실색하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헌금을 하지 않겠으며, 또 내 옷을 전당 잡히지 않을 것이고, 광고 전단을 거절하지 않겠으며, 그럴듯하게 말끔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즐기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p.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