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남에게 보이는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나 혼자 보는 일기장이야 앞뒤가 맞지 않아도, 상투적인 표현투성이라도 별 신경 쓰지 않지만 남 앞에 보이는 글은 처지가 다르다. 내가 그 누군가의 글을 보고 떠올렸을 생각을, 그 누군가가 나에게 한다고 생각하면 때때로 아찔하다. 그래서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다.
함께 사는 N에게 무심코 이 괴로움을 토로해보았다. "글쓰기.. 왜 이렇게 어렵지? 난 왜 이렇게 못 쓸까? 내 글은 왜 이 모양일까?.."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너처럼 글 쓸 생각조차 안 해서 네가 글 쓰는 거 보면 대단해 보이던데? 혹시 너 남들한테 잘 보이는 글을 쓰고 싶은 거야?" 멀리 갈 것도 없이 단번에 정곡을 찌른다. 글쓰기가 괴로운 까닭은 누군가의 시선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분명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해소되지 않는 마음이나 생각들이 있을 때, 글을 쓰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아서 좋았다. 때때로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대면할 때면 내 안에 무슨 빛이 스치기도 하였는데, 그 빛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고 싶어서 글을 쓰기도 했다. 풀리지 않는 일이 있거나,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있을 땐 그냥 뭐라도 적었다. 그러면 종종 나아졌다. 그러나 이런 감흥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이따금씩 까먹었다.
요 근래 글쓰기의 괴로움에 빠져 지냈는데, 글쓰기를 소재로 쓴 소설책이 한 권 도착했다. 2010년에 출간했다가 10년 만에 새 옷을 입고 나타난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민음사, 2020)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글쓰기 모임에 관한 소설이다. 계동에서 글짓기 교실을 열고 살아가는 김작가와 그 딸 영인이 그려가는 이야기를 줄기 삼아 '글쓰기'로 공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자인 영인은 "말할 수 없이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열일곱의 소녀다. 영인이 보기에 엄마 김작가는 모성애라고는 없는 철부지다. 이름 모를 문학계간지에 등단했다는 이력 하나로 주부들을 모아 글짓기를 가장한 수다 모임이나 떠는 지지리 궁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영인의 삶도 뭔가 구질구질하다. 십대시절 남들 다 하는 연애를 해보고 싶어 아무 남자한테나 들이대고, 모두 거절당하니 "연애 상대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바꾸는가 하면, 글쓰기 교실에 수작 부리러 온 건달을 짝사랑한다. 취업 정보 센터에서 만난 남자와 덜컥 동거를 시작하더니 밑바닥을 치고 헤어지고, 직장에 찌들어 살고 연애는 번번이 실패하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그곳은 그야말로 노동지옥이었다.
영인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내 인생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시간 때문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다고 고백하는 영인은 마음 깊이 외로운 아이였다. 그 외로움에 시달리다 친구를 만나 편지를 주고받고 일기를 끄적인다. 그러던 영인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영인도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내 몸속에 흐르던 차가운 강물이 시킨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형편없는 습작이었지만 영인의 글쓰기는 계속 이어진다. 영인에게 글쓰기는 일상을 돌파하는 힘이자 성장통이었다. 영인은 "연둣빛 봄이 오기 전에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참담한 심정"때문에 글을 쓴다. 질질 끌려가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글을 쓴다. 글을 아무리 써도 여전히 허점 투성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누가 알아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저 글을 쓰는 행위로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글쓰기와 웃고 울며 살아가던 영인은 어느새 훌쩍 자라나서 이제 김작가가 그러했듯 미국 뉴저지에서 '라이팅 클럽'을 모집한다. 영인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한번 써 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글을 쓰는 영인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은 영인이 그렇게 애증 하던 김작가의 마음이기도 하고, 수줍게 계동 글짓기 교실을 찾은 주부들과 해컨색 라이팅 클럽을 찾은 한인들의 마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 낸 소설가의 마음이자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이기도 할 게다.
소설에서 유독 마음에 남는 장면이 둘 있었다. 첫째, 수줍은 마음으로 라이팅 클럽을 찾은 제인이 영인과 대화하며 자신이 번역한 글들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고 하는 장면이다. 둘째, 계동 주부 글짓기 교실 회원들의 형편없는 글들을 모은 문집 <정열의 시간>을 보며 영인이 중얼거리는 장면이다. "세상에, 이런 쓰레기들도 있다니! 세상에, 이런 쓰레기들을 보았나!"
이 장면은 역설이다. 어떤 글은 '없어도 그만'이고 '쓰레기' 같다는 점 때문에 귀하고 힘이 있다.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던 김현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기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더라도, 이 글쓰기의 공간 안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글이 어떻더라도, 굳이 "발표하지 않을" 마음으로 끄적이는 글은 고귀하다. 그 마음이 담겼다면 이 세상에 없어도 그만인 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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