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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Jul 24. 2020

달의 세계, 6펜스의 세계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영국 런던의 증권중개인이자 중년의 가장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난다. 그가 향한 곳은 파리의 뒷골목, 이제 그는 예술혼에 사로잡혀 배곯는 게 일상인 화가의 삶을 살아간다. 그림에 취해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가던 그가 생의 마지막 목적지로 택한 곳은 머나먼 섬 타히티였다. 그곳에서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 문둥병에 걸려 죽어버린다. 죽은 후에야 그는 천재 화가로 이름을 떨친다.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민음사, 2000, 송무 옮김) 이야기다.


달과 6펜스는 둘 다 동그랗고 은은한 은빛을 낸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달'은 꿈과 이상의 세계, '6펜스'는 땅과 현실의 세계를 뜻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달의 세계와 6펜스의 세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세계에 살다 어느 날 갑자기 달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린 사람이다. 오로지 자기 욕망과 꿈 때문에 가족들을 버렸기에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그려야 해요" 그리지 않으면 죽어버리겠기에 그는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세속과 철저히 차단된 삶을 살아가는데,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안엔 가늠하기 힘든 역경이 담겨 있다.


반면 더크 스트로브는 6펜스의 세계를 살아가는 상업 화가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지만 내면엔 채워지지 못한 예술적 욕망이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스트릭랜드를 향해 이상하리마치 맹목적인 경외심을 갖는다. 그건 자기는 평생 갈 엄두조차 못내는 달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를 바라보는 경외감이다. 그에게 스트릭랜드는 이루지 못한 꿈과 동일시된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처럼 모든 걸 져버릴 용기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자기는 그런 그릇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알았던 걸까?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브뤼노 선장에 이르러 달의 세계와 6펜스의 세계는 화해한다. 그는 화자에게 스트릭랜드를 만나 동질감을 느꼈다는 이야길 전해준다. 자신과 스트릭랜드는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은 같았다며, 단지 스트릭랜드가 "그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자기는 "인생으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말을 한다. 그에겐 "아무것도 없던 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는 자긍이 가득했다.


서머싯 몸 자기 자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의 화자는 어떨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좇아 도착한 타히티 섬을 떠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타히티는 너무 먼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이 섬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한 장은 그렇게 끝났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느꼈다." 화자는 마치 달의 세계와 6펜스의 세계를 관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달의 세계는 멀어지면서 동시에 가까워지는 비밀을 간직한 세계다.


이 책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예술의 꿈을 저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로 울림을 주는 책이다. 그만큼 예술의 순수 속으로 흔들림 없이 저벅저벅 걸어들어간 스트릭랜드의 삶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 스트릭랜드는 자기를 잡아당기는 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그 앞에 투명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스트릭랜드의 이야길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아마 이 지혜와 용기에 반응하는 것이리라.


사실 스트릭랜드보다도 더 깊이 마음에 남았던 건 브뤼노 선장이었다. 소설에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그가 살아온 세계는 더없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의 세계는 나무 한 그루를 직접 심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자부심으로 채워져있었다. 삶에서 아름다움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걸까? 스트로브의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 그는 6펜스의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지만 달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줄 아는 이었다. 그 삶이 무의미하다고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으랴. 누군가에게 달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야 어디에 서 있든 무엇이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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