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정미경의 첫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화자들은 대체로 우울하고, 세계는 한없이 서늘하다. 냉정한 문장들을 조용히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엔 우울의 샘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 세계가 그토록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일상 속에 은폐되어 있거나 위장되어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 타인은 믿을 수 없는 존재, 어쩌면 가장 가까워서 가장 먼 존재다. 표제작이기도 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유선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 김주현의 아내다. 어느 날 유선은 작가의 미출간 원고를 유고집으로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으로 남편이 생전에 남긴 컴퓨터 속 파일을 열어본다. 암호가 걸려있던 파일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를 향한 사랑의 언어가 가득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느낀 배신감은 평생 홀로 간직할 수밖에 없는 잔혹한 진실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비소여인>에서는 내내 외롭게 살던 남자가 여인 윤을 만나 같이 살기 시작한다. 생기 없던 일상이 "속 깊은 정" 가득한 일들로 채워지고 행복이 무르익어 갈 즈음, 주변에 가까운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윤이 서서히 비소에 중독시켜 아무도 모르게 죽였기 때문이다. 이제 위협은 화자를 향해 다가온다. 무엇을 믿고 살 수 있을까.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서는 더 이상 타인을 향한 호의는 가능하지 않고, <달빛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결혼을 약속한 이들 사이에는 넘기 힘든 무지의 벽이 여전히 공고하다.
타인을 향한 두려움은 어쩌면 자본이 만든 세계의 풍경일지 모르겠다. 그 세계에서 자본은 자아를 무너뜨리고, 관계를 흩어놓는다. <성스러운 봄>에서 손해사정사는 보험의뢰인으로 옛 은사를 만난다. 대화가 오갈수록 은사가 불륜을 저지르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허위로 보험 신고를 하는 것이란 진실이 밝혀지는데, 그와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 섞인 진실도 드러난다. 그건 바로 돈 때문에 딸의 백혈병 치료를 포기해야 했던 현실이었다. <호텔 유로, 1203>에서는 시인을 꿈꾸지만 방송용 원고를 쓰며 살아가는 작가가 등장한다. 작가는 화려하게 치장한 가면 뒤에 숨어 쇼핑중독과 도벽에 빠져 살아가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만든 거대한 늪으로 점점 매몰된다. <비소여인>에서 윤은 비소에 중독시켜 사람을 죽이기 전에 생명보험을 잔뜩 들어놓는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출구 없는 지옥인 걸까.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마치 이 질문에 답하는 듯한 소설이다. 정은은 결혼을 앞두고 임시 거처할 곳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은 "문만 열면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칠 수 있는 골목길의 낡은 집이었다. 타인에게 간섭받기 싫어하고, 혼자가 편한 정은은 덜컥 다가와 술과 음식, 차를 건네고 일상에 초대하는 이웃들이 불편하다. 차츰 그들을 이해하고 가까워지지만 이 훈훈한 이야기는 결국 피비린내 나는 치정 살인극으로 막을 내린다.
골목길 이웃인 승우는 영화지망생으로 골목길 풍경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그 제목이 바로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다. 제목의 뜻을 묻는 정은에게 승우는 답한다.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
우리는 서로 비춰줄 수 있겠냐는 승우의 질문에 정은은 모르겠다고 답하지만,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이라고 되뇐다. 소설집 마지막에 쓰인 이 문장은 한없이 우울하고 서늘한 세계에도 희미하게나마 빛이 반짝였노라고 말한다. 때론 그믐달처럼 희미해서 주의를 깊이 기울여야 알아차릴 수 있지만, 또는 그냥 지나치고 나중에야 겨우 깨닫게 되지만, 그렇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는 빛이다. 이 지독한 세계에서 붙잡을 만한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희미한 빛'이 아닐까. 그 빛을 발견하려면 우리 각자는 모두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차가운 덩어리에 불과함을 알아차려야 하고, 나와 누군가의 틈 사이를 예민하게 응시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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