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 안, 여느 때처럼 꿀맛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났다. 어디까지 왔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분이 핸드폰을 꺼내 “오늘도 힘들고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라고 적었다. 그 장면은 마치 현상된 사진처럼 머릿속에 와 박혔다. 짧은 순간 내가 느낀 건 뭔지 모를 동질감이었다.
그 문장은 나도 종종 일기장 첫 줄에 적곤 했다. 팀장에게 깨지거나, 과하게 일이 몰리거나, 전날 잠이 부족해서 하루 종일 몽롱한 채로 보내거나, 동료들 간에 이견이나 오해가 생기곤 하면 그 날은 힘든 날이었다. 어디에 풀 곳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럴 때면 책상에 앉아 마음 달래는 일기를 적었다. 내일은 다른 날이겠지, 희망을 품으며 말이다.
그렇다고 내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되려 힘든 날이 쌓여가기도 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런 날이 연이어 계속될 때면 우울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거대한 질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난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내겐 이렇게 힘든 일 따위밖엔 없는 걸까?
‘힘들다’란 말을 금기어로 지정해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버리는 밤을 피해 아침일기를 적어보기도 했다. 일상이 늘 나쁘지만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돌아보니 세상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큰 곳이었고, 나를 둘러싼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민은 여전히 고민거리로 남았지만 세상이 좀 커진만큼 고민은 좀 더 작아졌다. 근심을 가져다준 일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어제의 심각한 일이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일이 판명나기도 했다.
그렇게 차분히 앉아 하루의 일을 복기하고 적어내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저 바깥세상은 대체로 힘들고 험하지만 이 작은 흑백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오롯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고, 이곳에 머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흰 종이 혹은 모니터 속 하얀 화면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 삶에는 힘들어할 일 말고도, 하루 종일 꼼짝없이 무언가에 매인 채 살아가야 하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까닭 없이 위로가 되는 날이 있었다. 그 날 내가 지하철에서 본 문장은, 이 위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격려 같은 속삭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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