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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Jun 30. 2020

핸드폰을 꺼내 “오늘도 힘든 날이었다”라고 적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 여느 때처럼 꿀맛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났다. 어디까지 왔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분이 핸드폰을 꺼내 “오늘도 힘들고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라고 적었다. 그 장면은 마치 현상된 사진처럼 머릿속에 와 박혔다. 짧은 순간 내가 느낀 건 뭔지 모를 동질감이었다.


그 문장은 나도 종종 일기장 첫 줄에 적곤 했다. 팀장에게 깨지거나, 과하게 일이 몰리거나, 전날 잠이 부족해서 하루 종일 몽롱한 채로 보내거나, 동료들 간에 이견이나 오해가 생기곤 하면 그 날은 힘든 날이었다. 어디에 풀 곳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럴 때면 책상에 앉아 마음 달래는 일기를 적었다. 내일은 다른 날이겠지, 희망을 품으며 말이다.


그렇다고 내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되려 힘든 날이 쌓여가기도 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런 날이 연이어 계속될 때면 우울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거대한 질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난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내겐 이렇게 힘든 일 따위밖엔 없는 걸까?


‘힘들다’란 말을 금기어로 지정해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버리는 밤을 피해 아침일기를 적어보기도 했다. 일상이 늘 나쁘지만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돌아보니 세상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큰 곳이었고, 나를 둘러싼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민은 여전히 고민거리로 남았지만 세상이 좀 커진만큼 고민은 좀 더 작아졌다. 근심을 가져다준 일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어제의 심각한 일이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일이 판명나기도 했다.


그렇게 차분히 앉아 하루의 일을 복기하고 적어내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저 바깥세상은 대체로 힘들고 험하지만 이 작은 흑백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오롯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고, 이곳에 머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흰 종이 혹은 모니터 속 하얀 화면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 삶에는 힘들어할 일 말고도, 하루 종일 꼼짝없이 무언가에 매인 채 살아가야 하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까닭 없이 위로가 되는 날이 있었다. 그 날 내가 지하철에서 본 문장은, 이 위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격려 같은 속삭임이었다.



Photo by Lee Soo hyu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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