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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May 21. 2020

비에 흠뻑 젖은 날


어젠 비가 내렸다. 오늘도 비가 올까, 출근하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오후에 조금 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란다. 하늘은 컴컴했지만 왠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비가 오지 않으니 오후에 오면 회사에 있는 우산으로 버텨보잔 생각에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에 도착하니 사람들 손에 쥐어진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우산들이었다. '다들 뭣하러 짐을 만들고 다닐까', 생각하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환승역에서 열차를 갈아탔는데, 맞은편에 누군가 두고 간 우산이 가장자리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왜 우산을 놓고 갔을까. 졸다가 화들짝 일어나서 튀어나가느라 깜빡했나. 우산을 갖고 나왔는데 비가 안 오니 저렇게 깜빡하지. 한 숨 자고 일어나도 그대로 있을까? 있으면 가져가야지. 근데 저런 거 가져가면 절도죄 아니.. 점유이탈물횡령죄던가 성립된다던데, 설마 그런 걸로 걸리지 않겠지?' 즐겁고 불온한 상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한 삼십 분쯤 잤을까. 한 정거장 남겨두고 겨우 일어났다. 눈 앞에 있던 우산부터 잘 있나 확인했는데, 누가 가져갔는지 없어졌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나 보다. 가져갔으면 회사에 두고 쓸 생각이었는데, 괜히 아쉽다.


역에 내렸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원래 지하라 어둡지만 평소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향하는데, 오가는 사람들 손에 들린 우산에 단추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설마. 주변부터 훑어보던 눈이 저 멀리 출구 쪽에 다다랐을 땐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우산을 접고, 또 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어찌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산을 살까. 그러기엔 아깝잖아. 택시를 잡을까. 그러기엔 너무 짧은 거린데. 잡히기나 할까. 비 맞으며 걸을까. 바람막이를 입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냥 늘 하던 대로 따릉이를 타볼까. 고민하다 일단 책부터 가방 안 깊숙이 피신시켰다.


여러 고민을 하다가 결국, 따릉이를 탔다. 그냥 몸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충분히 고민하고 따져본 건 아니었다. 지하철에 내리면 늘 주변에 따릉이가 몇 개 있는지 확인하는데, 그 날은 유난히 많았다. 괜히 그렇게 많을 리가 없지, 숫자 보고 안도하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비 사이로 막 가보자! 호기롭게 타기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속력은 나지 않았다. 미끄러질까 봐 조심히 타야 했고 중력은 막강했다. 평소엔 시시하게 보이던 빗방울은 육중했다. 청바지에 빗물이 떨어져 얼룩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금세 흥건해졌다. 점퍼는 5분이 지나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도 신발은 방수가 되는 녀석을 신고 나와 양말은 젖지 않았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양말만은 사수하리.


저 멀리 회사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빗물이 청바지를 뚫고 속옷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아 안돼 거기까진 안돼, 허벅지가 터져라 페달을 밟아댔고, 도대체 지금 뭐 하고 있나 스스로가 한심했고, 회사에 9시간이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고, 이 모든 일이 한순간의 결정으로 비롯된 일이란 게 믿기지 않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회사에 도착했다. 건물 바로 옆에 따릉이 대여소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직 여덟 시도 안 됐는데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휴지로 열심히 닦아내니 안도감과 허탈감이 범벅이 되어 찾아왔다. 그래도 괜찮다, 사무실에 조금 앉아 있으면 마를 것이다, 애써 마음을 추스렀다. 이렇게 잔뜩 비를 맞아본 게 얼마만이던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평소 못 해본 일 해보니 여러 생각 떠오른다. 씻어도 씻어도 씻겨지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 씻겨도 씻겨도 씻지 않으려는 완고함에 대해서, 그러든 말든 말없이 퍼붓는 야속한 비란 녀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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