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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Aug 23. 2020

우연히 만난 책방, 선물처럼 만난 책

강릉 동네책방 탐방기


올여름엔 강원도에 다녀왔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엔 종일 비가 내려 경치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 맞으며 산책만 겨우 했다. 마지막 날엔 강릉으로 넘어가 작은 동네책방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모두 처음 알게 된 곳이었고, SNS에서 즉흥적으로 찾아 고른 곳들이었다.

처음 도착한 책방은 해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해변은 분주했는데 이곳은 고요했다. 옆지기와 막 도착했을 땐, 손님 둘이 책을 읽고 있었다. 북카페도 겸하던 곳이라 두어 시간 차 마시고 책도 읽다 쉬다 갈 생각이었다. 얼마 후엔 있던 손님들도 떠나고 우린 조용히 책방을 지켰다. 두 시간 정도 머물렀나. 그 시간 동안 한 커플과 승려 몇 분이 들어와 책 구경을 하고 간 것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한여름 휴가철이자 휴일이었고,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해변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많았는데 이곳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책도 몇 권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찬찬히 책장을 둘러봤다. 양 벽면에는 기다란 책장이 죽 늘어져 있었고, 책들이 진열된 널따란 책상이 한쪽 벽면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동네책방이라고 하기엔 공간이 꽤나 넓었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었고, 주인장이 손수 적은 책 속 문장이나 추천의 말이 담긴 카드도 곳곳에 놓여있었다. 무얼 살까 책장을 빙 둘러보았지만 영 끌리는 게 없었다. 한쪽 벽면의 책장은 하나의 컨셉으로 꾸며져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 그 외의 책들은 왜 그곳에 놓여 있는지 일관성도, 개성도 부족해 보였다. 훌륭한 책들이 많았지만 형편없는 책도 같이 놓여 있어 신뢰가 가지 않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에 두어 바퀴 정도 둘러봤지만 도저히 살 마음이 드는 책이 없었다.

그곳에선 커피맛과 조용한 분위기만 맛보고 나왔다. 다음 책방은 번화가와 해변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과연 이곳에 책방이 있을까 싶은 동네 길을 돌고 돌아 도착했다. 그 책방은 오래된 공중목욕탕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곳으로 3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쓰고 있었다. 역시 카페를 겸하여 운영했다. 1층은 카페, 2층은 서점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2층부터 올라갔다. 이 책방의 컨셉은 고양이였다. 고양이책방을 표방하며 시작한 곳이라 고양이 관련 정보 책들,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만화, 그림책, 에세이와 소설 등 다양한 책들과 고양이 굿즈를 팔고 있었다. 한쪽엔 고양이와 관련 없는 책들도 있었다. 그 책들은 왜 여기 꽂혀있는지 궁금했다.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곳이라 사우나실이라든가, 세면대, 탕 등을 그대로 살려 활용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사진 찍기에 예쁜 곳으로 유명한지 한 커플은 1층과 2층, 바깥을 오가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곳은 과연 책방일까 카페일까. 책들은 그저 비슷한 부류끼리 진열한 느낌이었고, 주인장의 손길이 느껴지는 책 소개는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한껏 꾸민듯하지만 조명이 어두워 북카페로는 낙제점이었다. 분명 세련됐지만 인위적인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선 마침 필요했던 책 《고양이 본능 사전》과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나왔다. 기대가 커서 그런가. 아쉬움도 컸다.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낮의 바다>라는 작은 동네책방이었다. 역시 낯선 동네길들을 지나 도착했다. 옆지기는 피곤해서 차에서 쉰다고 하기에 주차해놓고 나 혼자 둘러보러 들어갔다. 앞서 방문한 책방이 실망스러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깐만 구경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들어갔는데, 그 잠깐이 30분을 훌쩍 넘겨버렸다.

<한낮의 바다>는 앞의 두 책방 넓이의 반의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 놓인 넓은 매대와 주변을 둘러싼 책장 하나하나엔 책방지기의 취향과 손길이 잔뜩 묻어있었다. 과하지 않은 인테리어엔 소박함이 깃들어 있었고, 마침 사람도 없어 조용히 둘러볼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보였던 책장부터 골라 한 권 한 권 톺아보기 시작했다.

<한낮의 바다> 출처:  instagram.com/midday_sea


(책구경에 정신이 팔려 사진을 하나도 찍지 못했다. 책방 사진은 허락을 받고 '한낮의 바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다.)


꽤 많은 책들에 책방지기가 손수 적은 책 속 문장, 짧은 추천사가 덧붙여있었다. 그 작은 종잇조각에 의지해 책을 천천히 들춰보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책도 손에 집어 들고 문장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어떤 책들은 나와 영 맞지 않았는데, 이따금씩 눈부신 문장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문장들은 다른 책으로 옮겨가도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천천히 그 작은 책방을 몇 바퀴 돌았다. 책들이 놓인 공간과 책방지기가 앉아 있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아주 우연히 책을 만나고 싶었다. 보통 책을 살 땐, SNS나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겉표지나 내용을 보고 혹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게 책을 사서 읽는 게 어느 순간 싫어졌다. 내 기준만으로 만나는 책들이 언제부터인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연히, 아주 우연히 마주치는 선물처럼 책을 만나고 싶었다. 길 걷다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에서 생각지도 못한 동그란 달빛을 만나는 것처럼, 별안간 예고 없이 찾아온 빗줄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오랜 장마 끝에 마주친 햇빛에 환한 미소가 얼굴에 드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선 '비밀책'도 팔고 있었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을 때,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을 때 정갈히 담긴 포장지 겉에 적힌 책 속 문장만 보고 고르는 책이었다. 9개의 비밀책이 준비되어 있었고 겉에 쓰인 글귀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한 권을 골랐다. 이제 떠날 시간이 얼마 안 남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책들을 마지막으로 들춰보러 갔다. 그런데 내가 골랐던 비밀책 겉에 적힌 문장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러 갔던 그 책 속에 적혀 있었다. 책을 사야 하나 망설이던 마음은 바로 정리됐다.

그 책은 바로 신유진 작가의 《열 다섯 번의 낮》(2018, 1984Books)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고, 평소에 잘 읽지 않는 에세이였는데 왜 이 책에 끌린 걸까. 신유진 작가의 다른 책들도 죽 훑어보았지만 유독 이 책이 마음에 남았다.  왜 어떤 문장은 가슴에 박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걸까. 그래서 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걸까. 그 끌림에 이끌려 가다 보면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이것 말고도 두 권을 더 샀다. 한 권은 김연수 작가의 신작 《일곱 해의 마지막》 동네 서점 에디션 친필사인본이었다. 서울에서 구해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강릉까지 와서 만나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또 다른 책은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었다. 앞에 고른 책을 쓴 신유진 작가가 번역한 책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낸 책이다.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작가라는데, 역시 처음 알게 된 작가다. 이 책은 1941년에서 2006년까지의 시간을 관통하는 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일기 같기도 하고, 비망록 같기도 한 책 곳곳엔 그 세월 동안 프랑스에서 살아온 한 여성이자 작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그 일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담긴 책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작가의 회고록 같은 글을, 프랑스엔 별로 관심도 없고 무지해서 온전히 의미를 알아채지도 못할 이 책을 고른 건 왜일까. 이 책은 내가 마냥 사랑할 것 같진 않지만 왠지 피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 책이었다. 

오랜 시간 책방에 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 찰나, 옆지기가 차에서 나왔다. 왜 이리 오래 걸렸냐는 말에 미안하다고 답했지만, 나는 뜻밖의 만남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나도 몰랐다. 아마 이 책방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강릉에 놀러 올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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